짧은 온천욕을 마치고 다음으로 간 곳은 아침의 태양(Sol de mánana)라는 이름의 간헐천 같은 곳이었다. 차에서 내리니 매캐한 냄새와 함께 여기저기서 수증기가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규모는 아니지만 지표면 여기저기 뚫린 구멍에서 갑자기 쉬익하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가 치솟는 광경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위키에서 찾아보니 이 곳은 해발 4800~5000m에 위치한다고 쓰여있었는데 당시 스마트폰 앱으로 봤던 높이도 대략 5000m 안팎이었던 기억이 난다. 가장 유명한 간헐천은 아침에 50m 높이까지 수증기가 분출한다고 하는데 나는 정오가 막 지난 시간이어서 그 간헐천이 분출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80년대 말, 이 곳을 개발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경제적인 효과가 없어 포기했다고 한다. (그 뒤 뉴질랜드의 국립공원에서 간헐천이 오전 특정 시간에 분출하는 모습을 봤는데 그 곳은 관광객을 끌기 위한 이벤트 성이 강했다. 이 곳처럼 땅속에서 데워진 증기가 더 이상 가둬지지 못해 지표를 뚫고 나오는 느낌이 아니라 뭔가 억지로 분출시키는 듯한 느낌이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언제쯤 식사를 할 수 있을까 생각될 즈음,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한가운데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볼리비아 남녀가 관리하는 이 숙소는 난방은 물론 안되고, 전기도 특정 시간만 사용할 수 있고,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으며, 수세식이긴 하지만 공용 화장실도 편하게 쓸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대자연을 보기 위해서는 여행자도 당연히 어느 정도의 불편은 감수해야 하기 마련이다. 이 정도 시설이라도 갖춰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 불편함이 싫다면 이 곳의 척박함을 불평할 일이 아니라 오지 말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볼리비아의 경제적인 발전과 정치적인 안정을 기원하지만 이 곳은 앞으로도 이 모습을 계속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광활한 자연과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풍광에 호텔과 리조트가 들어와 있는 모습은 왠지 마음이 아플 것 같다.



점심을 먹고 숙소 앞에서 쉬고 있는데 난데없이 야마 두마리가 지나갔다. 야생 야마인지 고삐도 없고 표식도 없었다. 다가가려고 하면 주춤주춤 물러서니 어쩔 수 없이 대충 사진을 찍었다. 해발 5000m에 가까운 이 척박한 곳에서 이 녀석들은 뭘 먹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왠지 마음이 짠해져서 두 녀석이 가는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오늘의 마지막 장소는 붉은 호수(Laguna Colorada)였다. 짙푸른 하늘과 다양한 누런색으로 어우러진 산, 붉은 빛의 호수가 만들어내는 색채는 강렬했다. 게다가 다른 호수에서는 몇 마리 정도였던 플라밍고가 이 곳에는 수백마리였다. 






플라밍고 흉내를 내며 사진을 찍고 있는, 같은 차를 타고 여행했던 70세의 미국인 노부부. 

활발하고 카리스마 있는 할머니와 점잖고 후덕한 할아버지 콤비는 여행중 만난 최고의 친구였다.

우유니 투어 후에 푸에르토 몬트에서 푼타 아레나스로 가는 나비막 크루즈를 타러 간다고 했다.

진정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공동침실과 외부 사이에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저녁 식사가 나오기 전에 숙소에서 묵고 있는 여행자들이 빙 둘러서 춤을 췄다. 젊은 친구들은 폼나게 춤을 췄고, 나이가 든 여행자들은 어설픈 춤을 선보였지만 춤실력은 별개로 인종과 국가, 나이를 떠나 이렇게 어울리는 것만으로 멋진 모습이었다.


저녁을 먹고나니 급속히 춥고 어두워졌다. 두달 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만난 여행자는 겨울에 했던 우유니 투어는 추위와 고산병 때문에 너무나 힘들어서 좋을 새도 없었다고 했다. 내가 우유니에 갔을 때는 북반구로 치면 4월 중순이라 봄이 한창이었음에도 밤이 되자 기온이 급속하게 떨어졌다.






숙소의 딱딱한 돌침대에는 무거운 담요가 몇 겹이나 깔려 있었다. 가지고 다니는 사계절용 오리털 침낭까지 더해서 침대 속에 파묻혔지만 새벽에 들어오는 한기를 모두 막기는 힘들었다. 이런 척박한 곳에서도 숙소를 운영하는 볼리비아인 남녀는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식기를 부엌에 가져다 줄 때는 내가 이 사람들 덕분에 편하게 여행하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매사에 감사하고 겸손해진다는게 여행이 주는 가장 큰 미덕인 것은 분명하다.


새벽에 소변이 마려웠다. 추위 때문에 침대밖으로 나가기가 정말 싫었지만 생리현상을 이길 수는 없어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화장실을 찾았다. 볼 일을 보고 다시 침실로 돌아가다가 우연히 본 창 밖에는 별빛이 가득했다. 살짝 숙소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스마트폰 플래쉬마저 끄자 온 세상은 완전한 어둠으로 가득찼다. 사방 어디에서도 불빛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완전한 어둠속에서 홀로 서 있는 느낌은 기묘했다. 예전 누군가 쓴 몽고 여행기에서 초원에 설치된 게르에 묵을 때, 한밤중 별빛에 끌려 나섰다가 게르를 찾지 못해 애먹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게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와닿지 않았던 글이 그 순간 완벽하게 이해되었고, 약간은 공포심마저 들었다. 다시 돌아와 침낭속을 파고들어 오들오들 떨면서 잠을 청했지만 방금 느낀 그 기묘한 느낌에 한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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