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리마의 숙소에 도착해서 조그만 해프닝이 있었다. 숙소로 예약한 곳은 리마 도심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호스텔이었는데 어두운 골목에서 지도를 보고 호스텔을 찾자니 애를 먹었다. 골목을 헤매다 우연히 2층에 태극기가 걸린 건물을 보고는 저긴가보다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예약한 호스텔은 태극기가 걸린 곳이 아니라 바로 옆 집이었다.


들어간 호스텔의 여주인은 동양인 배낭여행자를 보고 깜짝 놀라는 듯했다.(처음엔 왜 그런지 의아했다.) 여튼, 침대를 배정 받고는 쉬고 있는데 젊은 한국인 여행자가 찾길래 나가보니 옆집으로 와보라고 했다. 가보니 한국인 여행자들이 주로 묶는 호스텔은 내가 예약한 곳의 옆집이었고, 옆집 주인은 자신이 한국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한국 여행자들이 얼마나 많이 오고, 편안하게 묶고 있는지 열심히 설명하며 자기들 호스텔로 건너오라고 했다. 


이 두 집은 나란히 호스텔을 하고 있었는데 경쟁심 때문에 사이가 무척이나 좋지 않은 듯했다. 시설은 그쪽이 더 깨끗하고 한국 여행자들도 많아서 편할 것 같았지만, 묵기로 한 호스텔도 그다지 불편할게 없었던데다가 먼저 예약한 곳을 나오자니 내 양심이 편치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인에게 호감을 보인 것은 고맙지만 호스텔 주인의 상대방에 대한 비하가 너무 과한 것 같아서 아무리 한국인들에게 친절하더라도 나에겐 인상이 좋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니 옆집에 가서 설득 당하고 온 것을 아는지 여주인은 원한다면 돈을 돌려줄테니 옆집에 가도 좋다고 했다. 보아하니 이런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굳이 번거롭게 옮기고 싶지 않으니 그냥 머무르겠다고 했다.


내일 바로 와라스로 떠날 예정이고 오늘은 이미 늦은 밤이라 하루 몸만 뉘이면 되는데 이 두 호스텔의 신경전은 마음을 무척 불편하게 했다. 와라스 여행을 마치고 다시 리마로 돌아올 때는 이 두 곳 어디에도 오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이튿날, 손님을 지켜서인지 기분이 좋은 여주인은 와라스로 간다는 말을 듣고, 페루 북부는 치안이 좋지않으니 여행자들은 조심해야 한다는 둥 여러가지를 일러주고, 택시를 불러주며 호의를 배풀었다.(하지만, 와라스는 전혀 위험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친절했다.)


와라스로 가는 버스회사(Oltursa)의 버스 터미널


와라스로 가는 버스도 내부가 깨끗하고 나쁘지 않았다.


어렸을 땐 우리나라도 버스 회사에 따라 터미널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제 우리나라는 발권 시스템까지 모두 통합되어 어디서든 동일한 가격으로 빠른 버스를 탈 수 있지만 다른나라, 특히 남미는 버스 회사마다 가격도 다르고 터미널도 (가끔은) 달라서 항상 가격과 터미널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버스 상태는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나은 것 같았다.


이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안데스 여행지이자, 아름다운 안데스의 절경을 볼 수 있는 와라스로 간다.


버스에서 서비스로 나온 페루의 유명한 로컬콜라, '잉카콜라'


역시나 버스에서 나온 식사. 비행기 기내식과 비슷한 용기에 나온다.

맛은 둘째치고 버스에서 음식이 나오는게 감사할 따름이다.



오후에 리마에서 탄 버스는 일단 태평양과 접한 해안도로를 타고 북상한다. 그런데, 이 해안도로의 지형이 무척이나 특이했다. 바닷가 절벽으로 난 길을 타고 이동한 경험은 여러 번이었으나 이번에는 거대한 모래언덕 중간에 해안도로가 나 있었다. 차라리 언덕 위였다면 덜 했을텐데 공사하기도 힘들었을 언덕 중간으로 길을 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경치는 무척 훌륭해서 가는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모래처럼 보이는 언덕이 금방이라도 바닷물에 허물어질 것 같다.




한참을 모래언덕 중간으로 난 길을 달리더니 이번에는 또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누런 모래가 아니라 초록의 들판이었다. 해변과 바로 인접한 곳에 농작물을 키우고 있었다. 바다를 막아 간척지를 만든 것도 아니고 바로 옆에서 파도가 들이치고 있는 들판에 농작물이 자랄 수 있는 것인가. 간척지에서도 작물을 키우기 위해서는 토양이 머금고 있는 소금기가 빠지기까지 몇 년을 기다린 후에나 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하여튼 특이한 광경이었다.




해안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이제 서서히 산악지대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와라스가 그 주변에서는 꽤 큰 도시지만 해발 3000미터가 넘는 안데스 산자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버스도 3000미터를 단숨에 올라야 한다.




버스가 와라스에 도착한 것은 사방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였다. 고도가 낮아서 따뜻했던 이까나 리마에 비해 고도가 높아져서인지, 와라스는 초여름이었음에도 무척 쌀쌀했다. 와라스 시내는 어둠에 잠겨 있었고, 대부분의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겨우 찾아간 숙소에서 주인에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을 물으니 자신이 직접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주인이 안내한 곳은 넓은 마당이 있는 커다란 주택 같은 곳으로 시간이 늦어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레스토랑 주인은 나이 든 노부부였는데 늦게 온 손님이지만 고맙게도 기꺼이 맞아 음식을 내어 주었다.


페루의 흑맥주, CUSQUENA

남미의 맥주는 초기 유럽이민자들이 유럽의 양조기술로 제조한 탓인지 질이 훌륭하다.


올리브와 치즈, 야채가 풍성하게 들어간 샌드위치


늦게 도착한 탓으로 와라스를 둘러싸고 있는 안데스의 아름다운 산들은 전혀 볼 수 없었지만, 숙소와 레스토랑 주인들의 친절함에 어제보다 훨씬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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