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가 보이기 시작하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발을 옮길 수록 청록색의 보석이 조금씩 커지더니 모퉁이를 돌자 비로소 완전한 호수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69호수의 물빛은 정말 뭐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호수는 거무튀튀하고 거친 바위에 둘러쌓여 있는데다가 그 위로 빙하와 만년설이 펼쳐져 있으니 색상이 대비되어 더욱 그랬다. 들리는 것은 빙하에서 녹은 물이 호수로 떨어지는 소리와 바람소리 밖에 없었다. 뭔가 세상과는 이질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먼저 도착한 여행자들도 조용히 물가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놀랍고 환상적인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볼 다양한 경치는 아님에도 시간을 들여 보게 되는 것은 머릿속이 저절로 비워지는 외부와 단절된 이질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도 닦는 사람들이 깊은 산중을 찾는 것처럼.


얕은 곳은 투명한 물빛이지만 조금 깊어진 곳은 바로 깨끗한 청록색이 된다.



69호수의 물빛은 알프스나 파타고니아의 호수에서 본 물빛과 다르고,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 본 양가누코와도 또 달랐다.


호수만 따로 물감을 칠한 듯하다.


운좋게도 날씨가 맑아 산봉우리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트레킹을 시작한 높이가 해발 3700미터였고, 69호수까지는 4500미터가 조금 넘었다. 고지대라 힘들긴했지만 보통 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오를만했다. 어쩌면 칠레 아타까마에서부터 시작된 안데스 여행으로 몸이 고산지대에 충분히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르는 길에 만난 건장한 대학생들은 서울에서 리마에 도착해 바로 와라스에 왔기 때문에 전혀 적응이 안된 탓인지 오르는 내내 심한 투통에 시달렸다. (그래도 정수리를 움켜잡고 끝까지 올랐다.)


호수를 바라보며 더 시간을 보내도 좋겠지만, 택시 기사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에 내려가야 했다. 시간이 얼마 없어 부지런히 내려가면서도 경치에 감탄하고, 사진 찍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옆으로 인사를 날리고 휙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봤더니 백인 청년이 거의 달리듯이 내려가고 있었다. 더 놀라운건 그의 차림이었다. 청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4500미터 높이의 산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내려오는 중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발걸음을 빨리했지만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마침내 완전히 비가 되어 내렸다. 생각해보니 와라스에 도착한 날부터 오후에는 내내 비가 내렸었다. 계절상 그때는 오전에는 맑았다가 오후에는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맑은 날씨의 69호수를 차분히 만끽하고 내려오는 중에 비를 맞게 된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가늘었던 폭포의 물줄기도 이제 굵어져서 제법 커다란 폭포가 되어 있었다. 뛰어서 건널 수 있었던 개울도 혼자서는 건너기 어려울만큼 폭이 넓어져 있었다. 먼저 건넌 여행자들이 산악용 스틱이나 손을 내밀어 건너는 것을 도와주었다. 배낭여행의 좋은 점은 여행자들끼리 국적과 인종을 넘어서 서로 돕는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자연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좁은 길에서 마주치면 비켜주고, 인사하고, 도와주는 일이 특히나 많았다.


흠뻑 젖은 채, 택시를 타고 와라스 시내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심하게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게 졸았다. 졸다깨다 하며 내려 온 와라스 시내는 비가 그치고 노을이 곱게 내려앉고 있었다.




젖은 몸은 얼추 말랐지만 비가 온 탓에 기온이 떨어져서 쌀쌀했다. 식당을 찾아 돌아다닐 것 없이 자연히 어제 갔던 레스토랑으로 발길이 옮겨졌다. 레스토랑 안에는 우리의 화목난로 같은 난로가 피워져 있어서 추웠던 몸이 금새 따뜻해졌다.







호수 이름이 왜 69인지는 여행 중에 알지 못했다. 이번 블로그를 쓰며 찾아보니 근방에 있는 호수들에 이름이 없으니 번호를 붙인 결과 69번째 호수라서 그렇게 정해졌다는 글을 보았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번호로 69번째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호수였다.


그리고, 여행 중에는 호수에만 집중한 탓인지 오르고 내리는 중에 본 경치의 뛰어남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에도 감탄을 하긴 했지만 이번 글을 쓰며 올릴 사진을 하나하나 고르다보니 호수의 아름다움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욱 안데스의 풍광이 마음에 와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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