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메리다에 방문한 첫번째 장소는 미술관이었다. 정확히 무슨 미술관이었는지는 역시나 기억이 나지 않고, 찾기도 쉽지 않았다. 전시된 미술작품도 세계적인 작가도 아닌 것 같고, 전시물의 종류나 양도 많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개성있고 재밌는 전시물도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




이 미술관 전시물의 상당부분이 도자기나 흙을 구워서 만든 알록달록한 도기로 만든 작품이었다. 현대미술에 문외한이니 작가가 이 작품들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도기들을 재밌는 형태로 쌓아놓은 게 독특했다. 관람객이 잘못해서 건드리기만해도 떨어져 파손될지 모르는데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그냥 전시되고 있었서 괜히 긴장하게 만들었다.



또르띠야를 굽는 멕시코 여인






귀여운 소녀가 미술관 정원에 '미술관은 지루해'하는 표정으로 앉아있어서 웃음이 낫다.



아직 12월이 되지도 않았는데 가게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용품들을 팔고 있었다.


미술관에서 나와서 다음으로 간 곳은 메리다 역사박물관쯤 되는 곳이었다. 역사박물관이라해서 거창한 유물이나 전시물이 있는게 아니라 메리다 근대 역사를 사진과 간단한 자료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는 조그만 곳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물들을 돌아보던 가운데 눈이 번쩍 뜨일 사진을 한장 발견했다. 오래된 흑백 사진에는 20여명의 남녀노소가 찍혀 있었고, 사람들의 뒤에는 태극기가 멕시코 국기와 함께 걸려 있었다.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민족의 아픈 시대를 지내 온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우리나라의 슬픈 이민역사를 알고 있었기에 갑자기 목이 막혀왔다.


나라가 힘없던 시절, 위정자는 백성들을 보살피지 못하고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지킬 욕심으로 외세에 빌붙던 시절에 힘없던 백성들은 조금이나마 나은 삶을 찾아서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하와이로, 멕시코와 쿠바까지 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사탕수수나 선인장 농장에서 노예와 다를바 없는 고된 노동과 궁핍한 삶이었다.


대학교 다닐 때, 멕시코 이민 1세대들의 고난한 삶을 그린 애니깽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본적은 없고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애니깽이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어째서 이 영화의 제목이 되었는지 몰랐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애니깽이란 스페인어 Henequen(용설란의 일종)에서 비롯된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 후, 쿠바 이민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렇게나 고된 삶을 이겨내고 지금은 쿠바에서 자리잡고 살아가고 있는, 하지만 너무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분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도와 쿠바 공산화를 이루었으며 장관까지 역임한 분도 계셨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쿠바와의 국교 단절로 가보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지금은 이민 1세대는 다 돌아가시고 2세대 분들도 무척 고령이시지만, 본적도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며 아리랑을 부르실 때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다큐멘터리 방영 후에 정부와 기업의 노력으로 (그것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한국을 방문한다는 뉴스를 봤다. 그리고, 우연히 퇴근길에 삼성동 모호텔 앞에 주차된 관광버스에 쿠바교포들 방문을 환영한다는 문구가 적힌 것을 보고 무척이나 기뻤던 기억이 난다.


이 분들이 가지고 계셨던 돈은 안타깝게도 일본 지폐였다.


100년도 전에 머나먼 멕시코 유타칸 반도의 열대농장에서 이들이 겪었을 고난과 궁핍함이,

게다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메리다 마지막 날의 점심은 이 부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몰레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유명하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레스토랑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기다렸다 자리에 앉으니 먼저 식당 한쪽에서 또르띠야를 굽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몇 시간 전에 미술관에서 봤던 그 그림 그대로였다.



방금전에 구운 따뜻한 또르띠야가 흰 천에 싸여 나왔다.


세 가지색 몰레


닭고기가 들어간 까만색 몰레


메리다에서 먹은 몰레는 와하까의 몰레와는 조금 달랐다. 우리나라의 김치도 각 지역마다, 재료마다 다양한 종류가 있으니 와하까에서 한참 떨어진 메리다가 똑같은 몰레를 만들리는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와하까에서 먹은 몰레가 입맛에 더 맞았다.


밤이 되어서는 날마다 벌어지는 공연을 보러 갔다. 그 날은 하얀 옷을 맞춰 입은 연주자들의 연주와 노래, 민속춤 등이 공연되었다. 그리고, 마련된 좌석은 이미 현지 사람들과 여행자들로 꽉 차 있었다. 

 


비싼 공연이 아니라 소박하면서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공연이 날마다 벌어진다는게 놀랍고도 부러웠다.









메리다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다음날은 멕시코에 있는 수많은 마야유적지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치첸잇사를 거쳐 툴룸으로 가야했다. 이제 계획했던 멕시코 여행도 반쯤은 지나고 있었다. 어서 카리브해의 바다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메리다에 더 머무르고 싶은 생각도 많았다. 여행 초기였다면, 혹은 남아있는 여행일정이 많았다면 일정을 변경해서 더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여행중에는 간혹 여행자로서가 아니라 거주자로 머무르고 싶은 도시들이 있다. 뛰어난 자연경관이나 훌륭한 문화유적, 살기에 좋은 인프라가 갖춰진 곳이 아님에도 자꾸만 정이 가는 곳이 생기곤 한다. 분명 멕시코는 이방인이 마음놓고 편하게 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은 나라인데도 여행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런 곳들이 자꾸 늘어났다. 비단 여행지뿐만 아니라 주위 모든 것이 비슷하다. 좋은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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