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다에서 버스를 타고 치첸잇사로 향했다. 멕시코의 가장 큰 버스회사는 ADO인데 여느 남미의 버스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하고 편안했다. 버스에 짐을 실을 때도 승차권을 보고 짐에 태그를 붙여주고, 내려서 짐을 찾을 때도 승차권을 확인하고 내어주기 때문에 짐이 바뀌거나 잘못 찾을 일이 줄어든다. 일인당 국민소득으로 그 나라의 수준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반밖에 안되는 멕시코의 각종 사회 인프라 중에서 적어도 버스 시스템만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훌륭하다.



메리다, 치첸잇사 그리고 오늘 최종 목적지인 툴룸은 모두 유타칸 반도 끝에 있어서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다. 치첸잇사는 근처에 머무를만한 도시가 없어서 유적을 보고나서 바로 버스로 카리브해에 면한 도시이자 또다른 마야유적지인 툴룸으로 가기로 했다.


치첸잇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입장료를 사고, 배낭을 맡기고 유적지 안으로 들어섰다. 유적이 워낙 넓어서 모든 짐이 다 들어있는 25킬로그램짜리 배낭을 매고 다닐 수는 없었다. 다행히 안내소에서 배낭여행자들을 위해 무료로 짐을 맡아주고 있었다.


유적보다 먼저 눈에 띄인 것은 유적으로 들어가는 길에 가판에서 팔고 있는 각종 기념품들이었다. 나무로 깎아서 색칠한 마야인의 마스크, 마야달력, 마야인들이 숭배했던 동물 등 크기가 다양하고 모양이 인상적인 기념품들이 많이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나서 나중에 멕시코를 떠올리기에 무척 좋은 기념품들이었지만 짐이 늘어난다는 핑계로 사지 않았다. 결국 '하나쯤은 괜찮았을텐데...'하고 요즘 후회하고 있다.




198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치첸잇사는 '우물가 잇사의 집'이라는 뜻이다. 서기 5세기 경 잇사(Itza)족이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가 7세기말에 버려진 후, 다시 300년이 지나서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13세기 중반 잇사족이 다시 이곳을 떠났다. 거대한 건축물과 뛰어난 문명을 이룩했던 이들이 어째서 결국 이 도시를 버리게 되었는지는 알수가 없다고 한다.(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치첸잇사의 대표유적. 피라미드 꼭대기에 쿠쿨칸의 신전이 있어서 쿠쿨칸의 피라미드라고 한다.


가장 눈에 띄는 유적은 치첸잇사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마야의 피라미드다. 지금까지 와하까, 빨렝께 등에서 여러차례 마야유적지에서 피라미드를 봤지만 치첸잇사의 피라미드가 가장 복원이 잘 되어 있었다.


엘 카스티요(El Castillo, 성채)라고 불리는 이 피라미드는 이집트 피라미드에 비해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마야인들의 놀라운 과학기술(특히 수학과 천문학)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각면의 돌계단이 91개인데 네면을 모두 합하면 364개가 되고 마지막으로 쿠쿨칸의 신전을 합하면 365개로 1년 365일을 나타낸다. 이것만으로는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춘분과 추분에 해가 질때 쿠쿨칸 신전에서부터 시작된 뱀모양의 그림자가 해가 질수록 길어지면서 신전을 타고 내려와 맨 아랫쪽에 있는 뱀 머리모양의 조각과 연결된다고 한다. 천년 전에 이미 1년 365일과 춘분과 추분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이용해 놀라운 건축물을 만들어낸 마야인의 문명이 놀랍다. 더구나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이 서로 문명을 교류하며 발전한 것과 달리 마야인들은 독자적으로 이룬 문명이라 더 대단하다.

마야인들의 구기 경기장 모습이 보인다.


왼쪽 전사의 신전과 오른쪽 쿠쿨칸의 피라미드


마야문명은 건축술, 천문학, 수학에서 놀라운 문명을 이룩한 것에 비해 인신공양이 흔히 행해지는 문명이기도 했다. (멜 깁슨이 감독한 영화 '아포칼립토'에 잘 나타난다.) 그 대표적이면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풍습을 마야인들의 구기장에서 볼 수 있다.


커다랗고 단순한 구기장의 벽면 가운데에는 돌로 만들어진 동그란 장식물이 튀어나와 있다. 마야인들은 두편으로 나뉘어 서로 상대방의 구멍에 공을 집어 넣는 경기를 했다고 한다. 더구나 손을 쓰지않고 어깨, 허리, 다리, 등만을 써서 공을 집어 넣는 경기라고 한다.(과연 집어넣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경기의 목적이 이긴 편 주장의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진 편도 아니고 이긴 편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지만 이들은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전사의 심장을 제물로 바치기 위한 목적이었고, 선택된 사람도 영광으로 받아들였다니...


저 높고 조그만 구멍에 손을 쓰지 않고 공을 집어 넣는다는게 과연 가능할까? 메시라고 해도 한참 걸릴 것 같은데?




비록 많이 마모되었어도 마야인들의 부조는 대단히 화려하고 섬세하다.


유적 돌무더기에서 만난 이구아나(?)


수백, 수천개의 돌에 모두 해골모양이 새겨져 있다. 마야인들의 죽음에 대한 사고는 다른 민족과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치첸잇사 유적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세노떼가 있다. 메리다에서 봤던 맑고 깨끗한 작은 세노떼가 아니라 무척 커다란 웅덩이에 물도 무척 지저분해 보이지만 유적으로서는 커다란 가치를 지닌 곳이다. 이 세노떼는 인신공양이 행해지던 곳이라고 물 밑에서 많은 수의 어린아이들의 인골과 각종 장식품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인들이 남미를 지배한 이후에도 인신공양이 행해졌기 때문에 질겁을 한 스페인 지배자들이 이 풍습을 중지시켰다고 한다.


세계의 고대문화에서 인신공양은 여러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고대국가에서도 있었다고 하니 특정 지역만의 특이한 풍습은 아니었던 것 같다.)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신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행해졌던,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되는 이런 풍습이 과학의 발달과 인류의 성숙으로 사라졌다. 먼 미래에 오늘날 우리 사회를 고찰할 후손들은 우리에게서 어떤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찾아낼지 궁금해진다.




제물로 바쳐진 인간의 심장을 올려두었다는 제단과 비슷하게 생겼다.


치첸잇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유적은 전사의 신전이다. 신전 아랫부분은 수많은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고, 맨 위에는 제물로 바쳐진 전사의 심장을 꺼내 올려두는 제단이 있었다고 한다.






천문학과 수학에 밝았던 마야인들의 유적에는 대부분 천문대가 있다. 그 모습마저도 지금의 천문대와 매우 비슷하다. 





몇 시간동안 유적을 돌아다니고 나니 식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매표소가 있는 건물에 레스토랑이 있어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음식은 무척 깔끔하고 맛있어 보였지만 관광지에서 파는 음식이 항상 그렇듯이 그다지 훌륭하진 않았다.


아보카도와 커다란 새우가 버무려진 샐러드는 보이는 것만큼 훌륭하진 않았다.


치첸잇사에서 버스를 기다려 툴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다음이었다. 더구나 예약한 숙소는 버스터미널에서 꽤 멀었기 때문에 다시 가로등이 없는 길을 한참 걸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저녁식사를 하러 나갈 마음이 별로 생기진 않았지만 부실한 점심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 숙소 주인에게 근처에서 현지인들에게 유명한 해산물 식당 위치를 듣고 어두운 길을 되짚어 나갔다.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진 식당은 겉으로는 볼 품이 없었지만 현지에서는 꽤 유명한 곳인지 현지인들이 꽤 많았고, 빈 테이블에도 식사 후에 치우지 못한 그릇들이 제법 놓여 있었다.


새우와 오징어, 생선살이 잔뜩 들어간 해산물 샐러드. '이런게 해산물 샐러드다'라고 하는 듯.


얼큰한 해물탕 맛하고 똑같은 해산물 스프. 게, 새우, 오징어, 생선이 잔뜩 들어가 있다.


완전 최고였던 해산물 스프


멕시코의 가장 유명한 맥주는 코로나지만 현지에서는 이 Sol 맥주를 많이 마시고 있었다.


툴룸 해산물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빨렝께와 더불어 멕시코에서 먹은 최고의 음식이었다. 다시 숙소로 어두운 길을 걸어 돌아왔지만 훌륭한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탓에 어두움조차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제 밤늦게 메리다에서 맥주를 사러 가게에 갔더니 냉장고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알고보니 10시가 넘으면 술을 못팔도록 법이 정해져 있어서 냉장고를 자물쇠로 채우는 것이었다. 툴룸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가면서 오늘은 꼭 맥주를 사리라 결심하고 가게에 갔는데 역시나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분명히 10시 전이었는데도... 왜 그런지 점원에게 물어보니 9시 넘으면 술을 팔 수 없다고 했다. 10시 아니냐고 따졌더니 9시라면서 너 어제 어디에 있었냐고 물었다. 메리다에 있었다니 그제야 메리다하고 툴룸은 다른 주라서 법도 다르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젠장, 그 정도는 주들끼리 좀 맞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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