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카리브해에 도착했다. 어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웠고, 툴룸 시내는 해변에서 떨어져 있었기에 이곳이 바다에 접한 곳이란 것을 인식하기 어려웠지만 분명히 바다 냄새가 희미하게나마 나고 있었다.


이튿날 숙소에서 툴룸 해변에 대해 물었다. 바다에 접한 마야유적지가 있는 곳은 퍼블릭 비치쪽이었고, 그 아래로 레스토랑이나 펍들 소유의 프라이빗 비치가 늘어서 있다고 대답해주면서 지도에 괜찮은 레스토랑이나 펍을 표시해주었다. 숙소에서 준 지도를 들고, 마침 바닥난 경비를 은행 ATM에서 인출하고나서 지도에 표시된 프라이빗 비치 중에 하나를 골라 택시를 탓다.


여행을 하면서 많은 해변을 가봤지만 어느 해변에서든 자리를 까는 것은 퍼블릭 비치의 야자나무 그늘이었지 깨끗한 베드와 차양이 쳐진 프라이빗 비치는 처음이었다.




카리브해는 아름다웠다. 더구나 푹신한 베드에 누워 칵테일을 마시면서 보니 환상적인 색의 바다와 강렬한 햇살, 이국적인 야자나무가 다른 어느 곳보다 더 좋아보였다.










하지만, 불행이나 사고는 항상 마음을 놓고 있는 그 순간에 닥친다는 격언이 이번에 정확히 들어맞아버렸다. 해변에서 편안한 시간을 즐기고 나서 오후의 햇살이 서서히 스러질 때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마신 칵테일 값을 지불하기 위해 가방을 열었더니 있어야할 지갑이 사라져있었다.


해변으로 올 때 은행에 들러서 현금을 찾았으니 지갑을 숙소에 놓고 왔을 수는 없었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요금을 지불했으니 택시에 빠뜨렸을 가능성도 없었다. 해변에 들락날락하는 사이에 누군가 가방을 뒤져 지갑만을 가져간 것이다. 지갑은 명품이거나 가죽으로 된 훌륭한 것도 아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말시장 가판에서 산 조그만 천으로 된 지갑이었다. 하지만 지갑에는 하필이면 그날 인출한 현금 수십만원과 국제현금카드를 겸하는 신용카드가 들어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프라이빗 비치라고 해서 왔는데 소매치기가 손님의 가방을 뒤지는 동안 너희들이 아무것도 못봤다는게 말이 되는거냐고 레스토랑 매니저에게 따졌다. 매니저는 프라이빗 비치지만 해변으로는 아무나 왔다갔다 할 수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 경찰을 불러주겠다, 칵테일 값과 택시비는 받지 않을테니 얼른 숙소로 가서 조치를 취해라 등등의 말만 할 뿐이었다. (사실 그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을 거다.)


경찰이 오고 의례적인 질문이 몇 번 오간 후에 가능성은 적겠지만 소매치기를 잡고 싶다면 경찰서로 와서 조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화가 나고 짜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세계 어느 경찰이 여행자가 지갑을 분실한 것을 신경쓰겠냐 싶기도 하다. 게다가 여기는 이런 것은 범죄축에도 못끼는 멕시코가 아닌가 말이다.


숙소에 돌아오니 스마트폰으로 카드 결제 문자가 몇 통 와 있었다. 부랴부랴 카드사에 전화해서 카드 분실신고를 하고 정신을 차리니 이미 소매치기가 카드로 사용한 금액이 꽤 되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분실한 카드가 사용되었을 때 어떻게 보상을 받는지 찾아보고 카드사의 담당자와 통화하면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분실한 카드가 사용되었을 때 카드사로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하고 그에 대한 증서(정확하게 뭐라고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를 받아야 한다. 그 후에 카드사의 심사관이 심사를 해서 보상액수를 결정하게 된다. (보상액이 피해액의 50% 이상이면 양호한 수준인 것 같다.) 피해액이 적다면 차라리 무시하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데 피해액이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보니 툴룸의 경찰서를 찾아가야했다.


식욕이 전혀 생기지 않았지만 굶어서는 아직 남은 일을 처리하기 힘들테니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넣었다. 좋아하던 멕시코 음식인데 이날의 음식은 맛이 어땠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어째서 툴룸 경찰서는 그렇게 외진 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경찰서라면 시내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어야 사건이 생겼을 때 출동하기도 좋을테고 사고를 당한 사람도 찾아가기 좋을텐데, 툴룸 경찰서는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한참 가야하는,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사방이 어두운데 경찰서말고는 불빛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경찰서에는 사람들도 없어서 경찰서에서 사고를 당해도 조치를 받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경찰서 담당자는 먼저 온 현지인 아저씨와 조서를 작성중이어서 복도에서 한참을 기다려야했다. 그리고, 조서를 작성하러 들어갔더니 담당자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피해보상이고뭐고 전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구세주로 나타난 사람이 먼저 조서를 작성중이던 현지인 아저씨였다. 멕시코 사람답지않게 키와 덩치가 무척 큰, 약간은 험상궃게 생긴 아저씨가 나서서 담당자와 통역을 해주었다. 


이 아저씨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조서 작성을 마치고 증서를 받고나서 아저씨와 이야기해보니 아저씨의 가족이 안좋은 사고를 당해서 경찰에 신고하러 온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아쿠말(툴룸과 플라야 델 카르멘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숙소를 운영하고 있으니 한번 들르라면서 연락처를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중 처음 멕시코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날에 다시 친절한 멕시코인에게 도움을 받았다. 자신의 가족이 당한 사건을 신고하러 왔음에도 외국 여행자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시간을 들여 통역을 해주고(실제로 조서를 작성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태어나서 처음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한게 멕시코라니...) 여러가지 조언과 감정적인 위로까지 해주었다.


툴룸 경찰서의 복도 대기실


경찰서에서 돌아와 우울한 마음으로 잠을 자고 다음날 바로 툴룸을 떠나기로 했다. 카리브해에 접한 툴룸의 마야유적도 보기 싫었고, 그냥 툴룸을 벗어나고 싶었다. 다행인 것은 여행중 처음으로 멕시코에서 소매치기를 당했지만 멕시코와 멕시코 사람들이 싫어지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건 어제 만난 친절한 아저씨 덕분일 수도 있다. (고백하자면 그 아저씨의 도움과 친절이 너무 커서 뭔가 요구하는 건 아닐까, 무슨 목적이 있는건 아닐까 의심도 했었다. 내가 좋은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하니 다른 사람의 친절까지 의심했던게 많이 부끄럽다.)


숙소에서 나와 점심으로 길거리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아쿠말로 떠났다.



밤새 생각해 본 결과, 지갑을 훔쳐간 사람은 레스토랑에 있는 누군가가 포함된 소매치기 조직인게 틀림이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사용했던 썬베드가 해변 안쪽에 있어서 외부에서 누군가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던데다가 카드가 분실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대형 쇼핑센터에서 사용이 시작되었다. 레스토랑의 누군가 소매치기해서 건네주면 가져가서 결제가 되도록 하는 일사분란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 사인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되지만 외국에서는 분실카드 사용이 빈번하기 때문에 영수증과 신용카드의 사인을 비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짧은 시간에 여러군데에서 결제가 가능했다는 것은 쇼핑몰에도 소매치기 조직과 한통속인 사람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행중에 꽤나 신경쓰고 조심했었다. 그래선지 흔하게 발생하는 소매치기도, 도난사고도 한번 당하지 않고 10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여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날은 예외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은행을 다녀 온 뒤에 그 돈과 카드는 숙소에 두고 가지 그대로 가지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해변에 가방을 가지고 가지도 않았을테고, 필요한 만큼의 돈만 가지고 갔을 것이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른 날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소매치기를 당했다.


그 당시에는 당황스럽고 화가 나고 속 쓰린 일이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여행하는 동안 신체적인 위험이나 큰 사고를 당하지는 않았으니 그 정도는 다행한 일이 아니었나싶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럼에도 카리브해는 아름답게 느껴졌고, 곧 멕시코 음식도 다시 맛있어졌으며, 멕시코 사람들도 싫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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