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리쉐산은 높은 만큼이나 크기도 커서 며칠 머무는 것으로는 극히 일부분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몇몇 곳을 둘러보는 것조차 많은 시간과 체력을 필요로 한다. 메이리쉐산에서 잘 알려진 곳은 위뻥마을을 중심으로 갈 수 있는 신후(神湖), 신푸(神瀑), 빙후(氷湖)가 있고, 밍융마을에서 갈 수 있는 메이리쉐산에서 가장 큰 빙하인 밍융빙촨(明永氷川)이 있다. 처음에는 밍융빙촨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위뻥과 밍융사이에 마땅한 교통편이 없어서 하루를 소비해야 했기에 포기했다. 먼 훗날 넉넉한 시간을 들여 다시 오게 될 때를 위해 남겨두었다.(사실 위뻥에서 계획한 2박 3일로는 신후, 신푸, 빙후조차도 다 돌기 힘들어서 나는 빙후와 신푸에 가보기로 했다.)


샹그릴라도 그랬지만 이곳은 산이 높고 골이 깊다보니 일교차가 무척이나 심했다. 새벽에 일어나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국수 한그릇을 뱃속으로 넘기고 빙후로 출발했다. 사실 출발하는데 꽤 긴 시간이 걸렸는데 그 이유는 중국처자들이 화장하고 차림새를 꾸미는 것을 기다려야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와서도 화장을 해야하는지 이해가 되지않지만 이들 나이에는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한가보다. 아는 분 말마따나 이해는 되지 않더라도 존중은 해야하니까 기다려야했다. (남미에서 9월말에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할 때는 10월말의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악조건이었다. 추위와 바람이 극심했고 산장에는 미지근한 물조차 나오지 않아서 4박 5일동안 세수도 하기 싫었다. 중국처자들이 화장에 신경을 쓰는 것은 10월말의 이곳은 비교적 안락하다는 증거다.)


밍밍한 육수에 푹 퍼진 면발이 정말 맛이 없다. 중국사람들도 잘 먹지 않는걸로 봐서는 원래 이런 맛은 아닌가보다. 그래도 하루종일 움직이려면 그릇을 비울 수 있어야 한다.


백탑 주위에서 소원을 비는 통을 돌리는 듯이 흐르는 시냇물을 이용해 자동으로 통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누군가 방금 차라도 끓였는지 모닥불이 채 꺼지지 않고 남아있다.

메이리쉐산을 찾아오는 여행자들이 늘어나면서 휴게소를 만들거나 등산로를 정비하는 공사가 곳곳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 인부들이 쉬다 간 자리인 것 같다.


소나무겨우살이처럼 보이는 식물들이 늘어져있다.



빙후로 가는 초중반 트레킹 길은 오르막과 평지가 적당히 섞여 있어서 지루하지 않아서 좋았다. 쭉뻗은 침엽수림을 통과할 때는 상쾌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빙후로 다가갈수록 하늘에 구름이 끼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는 숲사이로 햇빛도 비춰서 날씨가 좋을거라 생각했었다.



빙후로 가는 마지막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분명히 심한 오르막은 아니었지만 비를 맞으며 물렁해진 흙길을 밟고 올라가자니 고산지대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꽤 힘들었다. 밑에서는 한시도 쉬지않고 재잘거리던 처자들도 오르막에서는 말소리도 내지 않는다.




바위산 옆으로 난 길을 힘들게 올라 드디어 고갯마루에 서니 아래로 빙후가 보였다. 보이긴 보이는데 덩그러니 자그만 호수 하나만 있으니 뭔가 썰렁한 느낌이었다. 날씨가 좋아서 구름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산봉우리가 보였더라면 감탄이 나올만큼 아름다운 경치였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보이지 않으니 빙후 하나만으로는 딱히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느라 들인 공이 있으니 손이라도 담궈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내려갔다.


높은 곳에서 찍어서 그렇지 아주 작은건 아니다. 커다란 연못정도 될 것 같다.



호숫가 거무스름한 것들은 모두 소원을 빌며 쌓은 조그만 돌탑이다.




호숫가에 내려와도 아쉬움은 가시질 않았다. 분명 물색도 보기 드물게 푸른 옥빛이지만 그와 어우러지는 풍경이 없으니 아쉬웠다. 옥색 물빛이야 위룽쉐산의 인공미 넘치는 백수하에서도 실컷 보지 않았는가.



구름으로 가려진 바위절벽 위로 눈쌓인 봉우리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면 옥빛 호수와 설경이 어우러져 감탄할만한 경치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티벳인들은 이 호수를 돌면서 소원을 빈다고 해서 나도 호수를 돌며 마음속으로 앞으로의 일들과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러고나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아무리 경치를 보며 멍 때리는 일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빗속에서 젖은 바위에 앉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오늘의 빙후가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 늦어서야 온 처자들은 이제야 셀피를 찍고 경치에 감탄하고 신이 났다. 올라올때는 기진맥진하던 사람들이 사진찍고 놀때는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기는지 전혀 피곤해보이지 않는다.


비를 맞고 서 있자니 몸도 추워져서 먼저 내려가기로 했다. 이들은 한참 더 여기서 시간을 보내려 할테니 내려가자고 재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잘 되었다 싶었다. 이제 내 페이스대로 산길을 걷고,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생긴 것이다. 멀리 있는 일행에게 먼저 간다고 손짓발짓을 해도 좀처럼 이쪽을 보지 않았다. 휴대전화도 이 깊은 골짜기에서는 전파가 닿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일행에게 알리지 못하고 먼저 발길을 돌렸다.


(개인적으로 빙후의 경치는 나쁜 날씨를 고려하더라도 그다지 훌륭한 것 같지 않다. 빙후까지 오는 길에 펼쳐진 풍경은 볼만하지만 신폭과 빙후를 비교하라면 신폭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위뻥으로 내려가다보니 날씨가 좋아지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졌던 봉우리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위뻥마을 입구에서 야크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야크가 다른 소보다 덩치가 크거나 그런건 아니지만 뿔이 커서 우리나라 한우처럼 순해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더니 방향을 돌려 다른쪽으로 갔다. 이녀석은 나에게 별 관심도 없었는데 괜히 혼자 겁을 낸 것같아 머쓱해졌다.


방목하는 돼지가 마을을 돌아다니다 말똥을 줏어먹고 있었다. 중국돼지가 맛이 좋은건 똥돼지라서 그런가?


숙소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1층 식당으로 갔다. 아기를 안은 주인할머니와 아기엄마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이 살갑게 이야기하는 것이 엄마와 딸 혹은 시어머니와 며느린줄 알았다. 할머니에게 점심을 먹을 수 있냐고 손짓발짓으로 물어보니 할머니는 아기엄마를 가리키며 뭐라고 한참 이야기했다. 아기엄마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할머니는 자꾸 아기엄마의 등을 떠밀었다. 따라 가보니 아기엄마는 다른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아기는 내가 봐줄테니 니가 손님을 데려가서 돈을 벌라는 것이었다. 졸지에 천덕꾸러기 손님이 되어버렸지만 뭔가 이들 사이에 유대관계를 엿본듯해서 재밌는 경험이었다.




점심을 먹고 숙소 벤치에 앉아 경치를 보고 있으려니 하늘이 점차 맑아오고 있었다. 이미 20킬로미터 가까이 걸었지만 돌아올때 혼자 걸었던 시간이 좋아서 더 걷고 싶어졌다. 다리에 아직 힘도 남아 있고 해가 지려면 시간도 있는데 이렇게 앉아있으려니 좀이 쑤셔왔다. 한참 후에 돌아온 일행에게 하위뻥 마을에 마실간다고 이야기하고 길을 나섰다.


저 아래 보이는 마을이 하위뻥이다. 고도차는 300미터쯤이지만 두 마을 사이에 난 계곡을 건너야 하므로 그리 만만한 길은 아니다.



페이라이시에서 유명한 경치는 아침해가 뜰때 메이리쉐산의 설봉들이 햇빛을 받아 금색으로 빛나는 모습이라고 했다. 어제 오후에 산봉우리에 끼인 구름이 많아져서 걱정이되었기 때문에 눈을 뜨자마자 숙소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살폈다. 깨끗하고 맑은 날은 아니었지만 산봉우리에는 오히려 구름이 없어서 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숙소 베란다에서 본 해뜨기 전의 메이리쉐산, 이때가 메이리쉐산이 가장 깨끗하게 보이던 순간이었다.


부랴부랴 채비를 갖추고 밖으로 나갔더니 바람이 심하게 불고 무척 추웠다. 얇은 옷을 여러겹 껴 입고 바람막이까지 갖췄어도 싸늘한 바람이 닿는 느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전망대에는 이미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위에 손도 떨렸는지 이날 아침에 찍은 사진은 유독 흔들린 사진이 많다.



3000미터가 넘는 고지대에서, 바람이 거센 이른 새벽에 웨딩촬영을 하는 커플이 있었다. 게다가 예비신부는 어깨까지 훤히 드러난 붉은 드레스차림이었다.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이라고 하지만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싶기도 하고 그런 순간이니 저렇게라도 남기고 싶은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신부들은 대부분 흰색이나 밝은색 드레스를 많이 입을텐데 중국의 신부들은 모두가 붉은색이다. 실제 결혼식장에서도 붉은색 드레스를 입는지는 모르겠지만 야외촬영하는 예비신부는 모두 그랬다.


아무리 본인이 원한 촬영이라도 추위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추위로 굳었는지 신부의 얼굴이 뭔가 어색하다.



전망대 한쪽에는 향을 꽂는 커다란 향로가 몇 개 있고 커다란 가마 같이 생긴 것도 있다. 이곳에서는 하루종일 향 연기가 끊이질 않았는데 아침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이곳을 찾은 티벳불교 신자들이 더욱 많았다. 정성스레 준비해 온 타르초를 걸려고 하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띈다.


타르초를 걸 준비를 하는 사람들과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마음일 무척 궁금해졌다.


한 사람이 한 묶음씩 향을 태우다보니 흡사 장작을 태우는 것 같다.


같은 중국사람들이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과 이곳에서 살아온 소수민족들은 생김새가 많이 다르다. 소수민족들은 고산지대에서 자외선을 듬뿍(?)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까맣게 탄 얼굴색을 보고도 알아볼 수 있지만 풍기는 기운도 억세다. 얼굴 생김새도 코가 높고 눈은 옆으로 긴 사람들이 많았다. 언뜻보면 무뚝뚝하고 무섭게 보이지만 이야기할 땐 잘 웃고 말도 많았다. 머문 기간은 겨우 일주일 남짓이었지만 내가 느낀 인상은 그랬다.




구름이 걷히길 바랬는데 어째 더 많아지고 있었다. 13개의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 몇 개를 제외하면 구름에 가려졌다 드러났다 하기를 반복하며 새벽부터 모인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해발 6740미터의 메이리쉐산 최고봉, 카와거보


언제 해가 떴는지도 모르게 눈쌓인 봉우리 끝에 아주 조금 붉은색 기운이 돌았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하'하고 내뱉는 탄식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옆에 있던 중국커플은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하지만, 사진으로 봤던 붉은 빛이 도는 황금색에 많이 못미쳐서 좀 실망스러웠다. 내 기대가 너무 과했을지도...


기대했던 황금색도 붉은 색도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본 사진은 보정의 효과인가?



카메라에서 지원하는 필터효과를 설정하고 찍었더니 좀 더 붉게 찍혔다. 그런데 나는 이런 필터효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물의 특정부분만을 클로즈업해서 찍을 때는 필터효과로 미쳐 보지못한 부분을 강조할 수 있지만 풍경사진을 찍을 때는 내 눈으로 본 그대로를 남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냥 내 취향이 그렇다.



구름은 점점 많아져서 산봉우리가 낮은 구름과 높은 구름 사이로 살짝 드러났다.  


해가 뜨고 구름이 많아져서 산봉우리가 완전히 가려지자 사람들도 슬슬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뻥으로 가는 산행길에 의외의 일행이 합류했다.(아니, 우리가 합류했다.) 어제 같은 숙소에 묵게 된 이십대 중국인들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페이라이시에서 시당으로 가는 빠오처를 같이 타기로 한 것이다. 이들이 예약한 빠오처에 우리가 돈을 나눠내고 타게 된 것이다. 일행은 수다스럽고 에너지 넘치는 이십대 중반의 중국여자 다섯, 이들의 친구로 조용하고 과묵한 중국남자 하나, 삼십대 초반의 한국남자 둘, 사십대 초반의 한국남자 하나가 되었다.


작은 빠오처에 억지로 껴서서 시당으로 출발했다. 페이라이시에서 시당까지는 가까운 길이 아니다. 거리는 33킬로미터쯤 되지만 길이 산등성이로 난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서 가야하기 때문에 한 시간쯤 걸렸다. 그리고 예상했던대로 메이리쉐산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매표소가 있었고 차를 막고 표를 검사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시당도 작은 마을이지만 여기까지는 차가 다닐 수 있다. 여기서부터 위뻥까지는 교통편으로 다니는 차가 없어서 말을 타거나 걸어서 가야한다. 하지만 그 전에 대여섯시간의 산행을 위해 식사를 먼저 해야한다.



시당에서 위뻥으로 가는 산길 입구에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조잡한 나무집이 있는데 여기서 음식을 판다. 뭘 시키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중국 여인네들이 시킨 음식을 받았다. 부슬부슬 날리는 쌀 위에 양념해서 구운 돼지고기를 몇 점이 올라가 있었다. 가리는게 없다보니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밥에 비해 올려진 고기가 너무 부족해서 나중에는 밥만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고기만 두배쯤 올려져 있다면 가격을 더 받더라도 좋을 것 같다. 


식사를 하고 오줌이 마려워 일하는 사람에게 화장실이라는 중국어를 이야기했더니(뭐라고 했었는지 잊어버렸다.) 뭐라뭐라 이야기하더니 손가락을 바깥으로 가리키고 휘휘 저었다. 화장실이 없으니 난처해야 정상인데 '이제 산속으로 들어왔구나' 싶어서 오히려 미소가 지어졌다. 


이 많은 밥을 고기 몇 점에 먹으라고? 니네 원래 짜게 먹는 사람들 아니었어?


같은 중국사람들이지만 이들은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라 받은 음식이 기대와는 달랐던 것 같다. 영 뜨는게 부실하다.


채비를 점검하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완만한 오르막이긴 하지만 산소가 부족한 고지대에서 배낭을 매고 오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쯤되니 호도협 차마객잔에 두고 온 내 등산용 스틱이 자꾸 그리워졌다. 운동하고는 담을 쌓고 산듯한 중국여인네들은 벌써부터 얼굴이 달아오르고 몇 발짝 걷고 멈추길 반복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느린 여자의 배낭을 같이 온 중국남자가 받아서 짊어졌다. (나중에는 그 다음으로 힘들어 하는 여자의 배낭을 한국 일행이 받아서 짊어졌다. 나는 그럴 체력이 안되는걸 잘 아니까 만용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티벳의 8대 성산이라더니 무척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었다. 여행자, 등산객들도 있지만 제일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차림새에는 흔한 등산화나 아웃도어 자켓은 없다. 낡은 운동화에 일상복을 입고 산길을 간다. 우리는 이곳에 도시에서 찌든 때를 벗고 머리를 비우러 온 것이지만 이들에게는 단지 살아가는 곳이 이곳인 것 뿐이다. 


내려오는 사람과 오르는 사람이 인사를 주고 받는다. 처음에는 뭐라고 하는지 몰라 고개만 꾸벅하고 멋적은 웃음을 지어 줄 뿐이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인사를 주고 받다보니 어느새 나도 그 단어를 흉내내어 인사를 받게 되고 결국에는 내가 먼저 인사를 하게 되었다. 아직도 그 단어가 '짜시탈레'인지 '나시탈레'인지, 혹은 '짜시달레'인지 '나시달레'인지, 어쩌면 다 틀렸는지 알지 못한다. 단어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인사를 주고받는 이들의 얼굴을 보면 내가 하는 서투른 흉내가 충분히 전해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대화는 단어로 하는게 아니라 의미로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내 손에 자기가 짚고 오던 얇은 지팡이를 건네주었다. 자기는 거의 다 내려왔으니 앞으로 갈 길이 많이 남은 네가 가지고 가란 뜻일게다. 지팡이가 도움이 될거란 기대보다는 산길을 가기에 나보다 훨씬 불편한 차림임에도 자신의 것을 선뜻 건네주는 그 마음이 고마워 얼른 받아들었다. 마음이 설레었다. 리장에서 그렇게도 실망했던, 나의 상상속의 윈난성 여행이 조금씩 현실이 되고 있었다.


며칠간 메이리쉐산 주변을 트레킹을 하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자주 생각났다. 만나는 사람마다 '올라'하고 인사하던 기억, 순례자들끼리 도와주고 챙겨주던 모습이 이곳과 무척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종교는 다르지만 두 곳이 성지순례 길이라는 것도 같았다. 나는 트레킹을 한 것이 아니라 며칠간 성지순례를 하는 티벳사람들을 따라 다닌 것일지도 모른다.


숲속으로 난 길을 한두시간 오르면 이런 쉼터가 나온다. 이 뒤로는 길이 조금 가파르지만 고도가 높아진 덕에 경치가 좋아진다.



며칠간 메이리쉐산 주변을 트레킹하는 내내 초록색 쓰레기통들이 몇 십미터 간격으로 나무에 매어져 있었다. 이렇게 쓰레기통을 설치하고 쓰레기를 수거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값싼 노동력 때문이겠지만 덕분에 길에 쓰레기가 거의 없었다.


고도가 높아지니 수목들 사이로 눈덮인 설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에 오르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이는 나이 많은 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서 이곳에 오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었는지 말에 매달리듯 타고 이곳을 오른다. 백일도 지나지 않은 젖먹이를 안고 있는 아기엄마는 출산으로 몸이 정상이 아닐텐데 아기의 건강과 복을 빌려는지 이곳을 오른다. 이들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를 네댓살된 아이들도 모두 자기 발로 이 곳을 오른다. 길을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남녀노소가 이 길을 걷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반대로 이 사람들은 여행자들이 굳이 이 먼 곳에 와서 산길을 걷는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어른도 힘들어 하는 길을 개구쟁이 셋이 신나게 걷고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버스 한정거장도 걷기 싫어하는데 이녀석들은 얼마나 튼튼한지 자꾸 웃음이 났다.


귀여워서 사진을 찍으려했더니 일렬로 줄을 서버린다.  녀석들 표정이 자연스러워 맘에 든다. 뒤따라오는 할아버지 표정도 좋다.



위뻥으로 가는 고갯길 꼭대기에 다다르자 갑자기 타르초의 물결이 앞을 가로막았다. 나중에 쉔푸(신폭)에서 해일같이 거대한 타르초들을 만나긴 했지만 이곳에서 본 타르초들도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명랑한 중국처자. 몇 마디 알고 있는 한국어를 쓸때마다 웃겨서 혼났다.




드디어 고갯길 꼭대기에 도착했다. 앞으로는 메이리쉐산의 설봉들이 보였다. 고갯길에 있는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위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행이 된 중국처자들은 친절하고 쾌활했지만 내 여행에서는 썩 반가운 타입이 아니었다. 어딜가든 찍어야 하는 셀피로 걸음을 자꾸 멈춰야하고, 내가 찍으려는 사진에는 자꾸만 섞여들어 방해가 되었다. 나에게는 이번 20일의 여행이 앞으로 몇 년 후에 다시 가질 수 있을지 모를 소중한 시간이라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내 생각과 발걸음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멈춰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꾸 반복되는 셀피와 단체 사진으로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잘못이 있는 건 절대 아니다. 15년의 나이차, 중국인과 한국인의 문화차, 이들의 여행과 내 여행의 목적차이를 무시하고 일행이 되어버린게 문제다.)


메이리쉐산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구름이 끼긴 했지만 그래서인지 더 거칠고 험해 보였다.



고갯길 아래 상(上)위뻥마을이 보인다.





여섯시간쯤 걸려서 상위뻥에 도착했다. 무리하지 않더라도 천천히, 꾸준히 걸으면 다섯시간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리다. 위뻥은 말그대로 심심산골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숙소건물 밖에 위치한 화장실과 샤워장은 물이 아주 빈약하게 나왔고(간혹 아예 안나오기도 한다.) 1층에 있는 식당은 맨 바닥에 자그마한 식탁 몇 개가 놓였을 뿐이다. 밤에는 천장을 뛰어다니는 쥐떼들로 쉽게 잠들기 어렵다. 숙박비는 우리돈으로 5000원이 채 되지 않았다. 이렇게 불편함이 잔뜩 모여있는 곳이지만 반드시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능하면 많이 변하지 말았으면 하는 곳으로 기억에 남아버렸다.


숙소 뜰에 코스모스가 피어있었다. 아침저녁으로 꽤나 추웠는데 어째 코스모스가 이제야 피었을까?

다음날 드디어 메이리쉐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샹그릴라도 중국내에서 무척 작고 외진 도시지만 샹그릴라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보니 공항도 있고, 도시도 계속 커지고 있는 반면, 메이리쉐산의 깊은 산중에 있는 위뻥(雨崩)은 60년대까지도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말그대로 심심산골이다. 그렇다보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샹그릴라에서 위뻥까지 하루만에 갈 수가 없다.(빠오쳐를 비싼 값에 빌려서 이른 새벽에 샹그릴라를 출발해 디칭현과 페이라이시를 그냥 지나치고 시당까지 논스톱으로 달린 다음, 시당에서 대여섯시간쯤 걸으면 당일에 도착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제대로 된 여행경로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자희랑 주인장이 고맙게도 디칭에서 샹그릴라로 여행자를 태우고 왔다가 돌아가는 빠오처를 수배해 주어서 저렴한 가격에 디칭까지 가는 교통편을 구할 수 있었다. 샹그릴라와 디칭 사이에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버스가 있긴하지만 버스터미널로 가는데 드는 비용, 좁은 좌석과 걸리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일행을 네다섯명쯤 모아서 빠오처를 이용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아침 일찍 출발한 빠오처는 중간에 중국인 여행자를 한명 더 태우고 디칭까지 부지런히 내달렸다.


넓게 보면 샹그릴라도 디칭(DEQEN, 德钦县)현에 속한 곳이지만, 샹그릴라에서 현청소재지인(것으로 보이는) 디칭까지는 4시간 넘게 차를 타야 한다. 200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지만 해발 4500미터에 가까운 고개를 넘어야 하는 등, 가는 내내 구불구불한 산길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은 도로 사정이 좋아져서 이 정도이지 사정이 나빴던 예전에는 얼마나 걸렸을지 생각하기 어렵다.


얼마나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산중턱에 차가 멈췄다. 보이는건 주차장과 매표소로 보이는 건물이 전부였다. 중국 관광지의 유별난 특징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차가 멈춰선 곳은 진사강(金沙江)을 볼 수 있는 전망대였고, 이 전망대의 매표소에서는 오늘의 목적지인 페이라이시 전망대, 메이리쉐산 입장권 통합한 표를 팔고 있었다. 예전에는 관광지별로 별개의 표를 팔았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메이리쉐산 입장권만 사고 다른 관광지 입장권은 사질 않으니 모두 묶어버린 것 같다. 매번 당하는 일이지만 당할 때마다 기분이 좋진 않다.



이곳도 메이리쉐산 국가공원이라고 하는데 정작 메이리쉐산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있어서 보이지도 않는다.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보다 더한 우유니에서도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봤으니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들의 체력과 용기에 절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마침 여행직전 EBS 세계테마기행 장강편에서 본 것이었다. 높은 전망대 밑으로 험하고 척박한 산골짜기를 굽어 흐르는 진사강이 내려다보였다. 진사강 건너편은 쓰촨성이고 전망대가 있는 쪽은 윈난성이다. 이 작고 좁은 물길이 다른 여러 물길과 합쳐져서 거대한 장강을 이루고 중국을 남북으로 나누며 흐른 끝에 상하이에서 바다로 흘러든다. 거대한 산맥과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제법이긴 하지만 비싼 입장료를 지불할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니 찾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다른 관광지와 묶어서 패키지 입장료를 만들어버렸다.



저런 길을 볼 때마다 어떤 사람이 저 길을 다니는지, 저 길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는지 궁금해진다.

10년 전 모스크바 출장길에 비행기 창밖으로 시베리아 평원에 난 길을 보며 궁금해했던 뒤로 항상 그렇다.


세계에서 세번째로 긴 강이라더니 지도에 그려진 장강을 보니 길긴길다.


우리가 타고 온 빠오처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 있다.




전망대에서 쉬었다가 다시 출발했다. 산은 높아지고 길은 더 험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창밖으로 꽤 높아보이는 설산이 나타났다. 이곳이 메이리쉐산이냐고 물었더니 운전사는 바이마쉐산(白馬雪山, 백마설산)이라고 대답해주었다. 바이마쉐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잠시 차를 세웠다. 5000미터가 넘는 봉우리 스무개가 펼쳐진 이곳의 경치는 대단히 훌륭했지만 주변에 아무런 시설이 없어서 야영을 할게 아니라면 메이리설산으로 가는 길에 잠시 차를 멈추고 경치를 둘러보는 정도에서 끝낼 수 밖에 없다.



4000미터가 넘는 고갯길에서 세찬 바람을 맞으며 서 있으니 자연의 광활함,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거대함이 느껴졌다. 이번 여행기간이 윈난의 가을이 가장 깊어진 시기였는데 우리나라의 가을처럼 울긋불긋하게 단풍이 물들지 않았다. 고도가 높아 다양한 수목이 살 수 없는 환경이어선지 대부분은 노랗게 물든 나무 아니면 사철 푸른 침엽수였다.



이미 눈이 여러차례 내린 듯 산등성이에는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다.

 



5430미터의 바이마쉐산 좌우로 5000미터대의 봉우리들이 거대한 산맥을 이루고 있다. 이번 블로그를 쓰면서 '백마설산' 혹은 '바이마쉐산'으로 검색하다보니 '바이망쉐산(白茫雪山)'만 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나보다 생각했는데 오늘 어느 분의 블로그에서 두 산이 같은 산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중국 운전사가 '바이마쉐산'이라고 알려줬으니 나도 그에 따라 '바이마쉐산'으로 쓰기로 했다.


바이마쉐산 전망대에서 몇 개의 산등성이를 지나면 윈난 최고봉 메이리쉐산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5000미터대였던 바이마쉐산에 비해 1000미터 이상 높은 메이리쉐산은 얼핏봐도 훨씬 높아보였다. 산에서 흘러내린 거대한 빙하도 눈에 들어왔다. 차안에서 말을 잊은채 메이리쉐산의 웅장한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오늘의 목적지 페이라이시에 가기전에 일단 더친에 도착했다. 원래는 더친에서 페이라이시로 가는 바오처로 갈아타야 하지만 중국어에 능숙한 동행 덕분에 비용을 조금 더 주고 페이라이시까지 타고 가기로 했다. 더친은 깊은 산골짜기에 형성된 도시라서 경사가 급한 도로를 따라 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산과 바다라는 차이가 있지만 이탈리아 포지타노에서 본 마을 풍경과 흡사했다. (물론, 포지타노처럼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러운 맛은 없다.)


산골짜기에 형성된 도시, 더친. 사진에서는 급경사가 잘 느껴지지 않지만 건물들이 무척 급한 경사면에 지어져 있다.


더친에서 간단히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고 일단 운전사와 헤어졌다. 돌아다니다 현지인들이 식사하고 있는 식당을 찾아 무턱대고 들어갔다. 옆 테이블에서 시킨 음식을 따라 주문하고 희끄무레한 음료까지 시켰다. 야크젖으로 만든 것인지 미지근하게 데운 음료는 조금 쿰쿰한 냄새와 짠맛이 났다. 부족한 염분이나 미네랄을 보충하기 위해서인지 소금을 제법 타서 먹는 것 같았다. 식사를 방해하는 파리들을 부지런히 쫓으며 나온 음식들을 뱃속에 밀어넣었다.


더친에서 페이라이시는 10킬로 남짓되는 거리라 금새 도착했다. 내일 아침이면 메이리쉐산의 산중마을 위뻥으로 출발해야하니 근처의 저렴한 방을 잡고 서둘러 메이리쉐산이 보이는 전망대로 나갔다.



이 전망대도 미리 샀던 패키지 입장권에 포함되는 곳이다. 전망대 뒤로 숙소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굳이 전망대를 찾지 않아도 숙소 창문이나 옥상에서 쉐산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곳도 패키지로 묶은 듯 싶다. 살 수 밖에 없는 입장권이지만 기왕 산 것이니 열심히 써줘야 한다.


티벳승려 복장의 남자가 메이리쉐산을 바라보고 있다.



6000미터급 봉우리 13개로 이뤄진 메이리쉐산은 티벳불교 8대 성산이다. 그래서인지 페이라이시 전망대에는 관광객, 여행객뿐만 아니라 많은 현지 티베트인들이 탑을 돌고, 합장을 하고,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중세시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로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성지순례를 했듯이, 이슬람인들이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를 하듯이, 티베트인들은 이 높고 고고해 보이는 산을 성스럽게 여기며 찾아오고 있었다. 이들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준비한 울긋불긋한 천에 티벳불교 경전을 찍은 타르초를 가져와서 설산이 잘 보이는 곳에 걸고 소원을 빈다. 강한 햇볕에 바래고 바람에 낡은 타르초부터 방금 걸었는지 깨끗하고 선명한 것까지 수많은 타르초가 걸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이런 깔끔한 전망대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메이리설산이 티벳의 성산이었던 것은 변함이 없지만 이 외진 곳까지 도로가 놓이고 중국내 여행인구가 많아지면서 잘 꾸며진 전망대가 생기고 그 뒤로는 수많은 숙박시설이 생긴 것 같다. 원래는 이 근처에 있는 페이라이시(비래사)라는 티벳불교 사원의 일부가 이곳에서 신자들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다.



해가 서서히 기울어가자 많던 관광객들이 대부분 떠나고 조용해졌다. 오후 햇살 속에서 백탑과 그 뒤로 펼쳐진 메이리쉐산을 보고 있으려니 지팡이를 짚고 조용히 백탑을 돌고 있는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 시골에서 왔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 분에게 지금 이 시간은 평생의 소원이 성취되는 극적인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자주 찾는 분인지, 평생의 염원으로 이번에 처음 오게 된 분인지 모르겠지만, 엄숙한 표정으로 걸음걸음 집중해서 백탑 주위를 몇 번이고 돌고 있었다. 행색이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는 이들이 정성스레 만든 타르초를 걸고, 오체투지를 하는 모습을 보며 이들에게 종교가 인생에서 갖는 의미가,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졌다.


봉우리에 쌓인 하얀 만년설과 할아버지 머리에 쌓인 하얀 나이의 흔적이 무척이나 비슷한 느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왓장으로 절에 공양하는 일이 이곳에서는 판판한 검은 돌로 행해진다.


6740미터에 달하는, 윈난에서 가장 높은 이 봉우리는 오후가 되면서 오히려 구름이 두터워져서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쉬운 마음이 컸는데 지금 다시 사진을 보니 아쉬움에 투덜거렸던 시간조차도 아깝게 느껴진다. 출근 전, 회사근처 까페에서 그 때를 정리하고 있으려니 그곳의 바람과 햇살과 공기가 더욱 그리워진다. 분명 지금 이 순간이 훨씬 안락하고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열흘 넘게 윈난을 여행한 시간 중에 가장 좋았던 시간이 이 날 오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뭔가 밍숭맹숭하다고 느꼈던 여행이 짭조름해진 것과 함께 윈난에 온 걸 잘 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숙소 주인의 어린 딸. 결혼도 하지 않은 동행 중 한 명이 고무찰흙을 빚어가며 오랫동안 놀아주었다. 아이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쉽게 친해질 수 있다.


저녁으로 먹었던 훠궈... 내가 먹어 본 훠궈 중에서 가장 훌륭했다.


식당을 겸하는 숙소에서 맥주를 마시고 저녁으로는 야크고기 훠궈를 먹었다. 베이징이나 쿤밍에서 먹었던 훠궈와는 다르게 육수에 향신료 맛이 강하게 나지 않았고 맛이 흔히 먹는 샤브샤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야채와 두부, 야크 고기를 넣어서 익혀 먹고 나중에 국수까지 넣어서 먹는다. 나중에 샹그릴라로 돌아가서 자희랑 주인에게 중국인들이 파는 야크고기에 아편인지 대마인지 마약성분을 조금 넣어서 중독성있게 만든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먹은 야크고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드럽고 담백해서 무척 맛이 좋았다.


내일은 위뻥까지 가는 메리설산 트레킹의 첫날이다. 날이 어두워지니 기온이 뚝 떨어졌다. 화장실에는 온수는 커녕 변기에 물도 내려가지 않는 후줄근한 숙소였지만 메리설산 트레킹을 시작한다는 설렘과 전기장판의 온기에 의지해 깊은 잠이 들었다.

비타하이(碧塔海, 벽탑해)는 샹그릴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자그마한 호수이다. 멀긴 하지만 이 근방에서 가장 큰 호수인 루구호는 호(湖)자를 쓰는데 어째서 훨씬 작은 비타하이는 바다(海)라고 이름을 붙었는지 잘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정보로는 루구호가 더 끌렸지만 왕복 이틀이라는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다가 루구호보다는 메이리설산에 목표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비타하이로 대신하기로 했다.


야크버거로 배를 채우고 숙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길을 나섰다. 사실 10살이나 어린데다 반쯤은 산악인 같은 이들하고 자전거 하이킹을 하자니, 같은 나이대에서는 나름 체력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지만 혹시 민폐가 되지는 않을지 적잖게 걱정이 되었다. 숙소 주인장에게 대충 코스를 듣고 출발했지만 샹그릴라 시내를 벗어나서 비타하이로 가는 길을 찾는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여러번을 물어서 겨우 비타하이로 가는 고갯길 앞에 도착했다. 완만한 고갯길이었지만 해발 3500미터가 넘는 고지대에서는 이마저도 쉽게 볼 수는 없었다. 멈추라는 이성의 경고를 여러번 무시하고 나서야 겨우 고개 정상에 설 수 있었다. 고개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을 신나게 내달린 끝에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호수쪽으로 다가가니 매표소가 있고 표금이 자그마치 100위안부터 6,700위안까지 붙여져 있었다. 멀리 호수를 보며 한참을 더 가도 매번 보이는 것은 입장료를 받는 건물이나 매표소만 있었지, 호수쪽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이곳도, 저곳도 호수쪽으로 난 길은 모조리 사설 관광시설로 가는 길이다.


알고보니 호숫가를 차지하고 요금을 받고 있는 곳은 사설 관광시설이었다. 관광객을 말에 태워 호수를 돌아보게 한다던지, 티벳전통공연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이런 곳들이 호수를 빙둘러 차지하다보니 우리처럼 단지 호수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근처에 갈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된거 한바퀴 돌아보자하고 호수를 커다랗게 두르고 있는 도로를 따라 무작정 자전거를 몰았다.


호수를 삼분의 일 정도 돌고나니 호수가 꽤나 가까워져서 들어가도 될 것 같은 곳이 나왔다. 하지만 사진을 찍으며 가까이 가다보니 더 이상 들어가면 돈을 내야 한다며 갈 수 없다고 했다. 짜증이 팍 솟았다. 호수가 개인의 것도 아닌데 호수를 둘러싼 땅을 차지하고 앉아서 가는 길을 막고 있으니...



비타하이는 호수 자체는 작은데 도로는 호수를 한참 멀리 두고 빙 돌게 되어 있어서 도무지 호수쪽으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인장 이야기로는 요즘이 비타하이가 한창 아름다울 시기라고 했는데 아무리 주변을 봐도 그닥 아름답다고 할만한 풍경은 아니었다.


차라리 호수 반대편으로 보이는 설산 풍경이 더 낫다.




비타하이에 실망하면서도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수는 없으니 계속 앞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호수를 거의 반쯤 돌고 나서야 호숫가에 설 수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경치는 그닥 볼게 없더라도 물은 맑아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물조차도 누런 흙빛에 쓰레기들이 잔뜩 떠 있었다. 


경치에 실망하니 몸도 힘들어지고 슬슬 다른 것들이 신경에 쓰이기 시작했다. 호숫가를 하이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쿠터를 타고 있었고, 자전거로 돌고 있는 사람은 우리가 유일했다. 지나는 사람들마다 '니네 정말 대단하다'는 듯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거나 박수를 치며 '짜요!'를 외쳤다. 중국어를 잘하는 친구가 그들에게 물어보니 스쿠터 대여 가격이 우리의 자전거 대여가격보다 조금 더 비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스쿠터나 알아볼걸 괜히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생각에 셋다 투덜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여행의 즐거움은 항상 생각지 못한 곳에서 찾아오기 마련이다.



자전거를 탄 지도 세 시간이 되어가니 엉덩이가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호숫가에서 쉬고 있는데 스쿠터를 타고 오던 티벳 전통의상을 입은 아주머니 두 명이 내리더니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 시작했다. 넉살 좋은 친구들이 가서 말을 붙이고 가서 사진을 찍자고 하니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허락없이 얼굴나온 사진 써서 미안. 사진이 맘에 들어서... 불만있으면 연락하셈.


그 중 한 친구가 아주머니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자고 하니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웃음을 참지 못하던 아주머니는 겨우 사진기 앞에 서긴 했지만 부끄러움에 사진기를 보지도 못했다. 아주머니도 넉살 좋은 한국인 청년의 팔짱이 싫지만은 않은지 화를 내거나 팔짱을 풀려고 하지는 않고 마냥 수줍어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재밌으면서도 순박해서 그 아주머니 일행까지 모두 배꼽잡고 한참을 웃어댔다.





다시 한참을 달렸다. 이젠 안장에 닿은 엉덩이가 얼얼할 정도였고, 해가 기울기 시작하니 날도 추워졌다. 그럼에도 건조한 공기에 목은 금방 말라서 출발전에 산 물은 떨어진지 오래였다. 찬 바람과 건조한 공기에 입술마저 갈라질 지경이었다. 길가에 할머니 두 분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물을 사고나니 할머니 한 분이 야크 우유를 마셔보라고 자꾸 권하기 시작했다. 리장에서도 야크 우유라면서 파는 것이 있었지만 그건 야크의 것인지 젖소의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는데 이곳이라면 보이는게 전부 야크뿐이니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참에 한번 마셔보기로 했다.


야크젖으로 만든 요쿠르트(?), 버터(?) 같은 것들을 자꾸 구경시켜 주셨다.



야크젖 세잔을 요청하니 할머니는 짜놓은 우유를 냄비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짠 우유를 끓여 소독을 하고 잔 세개에 담아주셨다. 뜨뜻하게 데워진 우유는 일반 우유보다 좀 더 고소한 맛이 강했다. 평소에 먹던 것이 아니라 혹시 배탈이 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다른 할머니는 안에서 야크젖과 이런저런 것들을 섞어서 뭔가를 만들고 계셨다. 중국어를 잘 하는 친구도 티벳 할머니의 말은 알아듣기 힘든지 반쯤은 앞뒤 상황으로 추측해야 했는데, 그의 설명으로는 치즈 같은 것을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뭔가 쿰쿰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나기도 해서 그런가보다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치즈보다는 버터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



할머니 가게에 놀러 온 동네 아저씨


결국 할머니에게 치즈 같은 무언가도 조금 사서 어떻게 먹는 것인지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가 냄비에 그것을 넣고 녹이자 쿰쿰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확연히 강해졌다. 거기에 곡식 가루같은 것과 설탕을 잔뜩 넣어서 섞은 다음에 먹어보라고 주었다. 달달하고 짭짤하면서도 쿰쿰한 냄새가 나는 그것에 처음에는 살짝 맛만 보는 정도에 그쳤는데 할머니 성의를 생각해서 조금씩 자꾸 먹다보니 익숙해져서 결국 거의 다 먹었다.



평소에는 저것을 무엇과 함께 먹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먹기에 색깔과 모양이 썩 훌륭하진 않다.


티벳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관광지처럼 보였다.


춥고 힘들어서 이 뒤로는 찍은 사진조차 없다. 이 뒤로도 오랫동안 자전거를 더 타야했고 며칠동안 의자에 앉을 때마다 엉덩이가 아팠다.


해는 기울어서 점점 어둡고 추워졌지만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샹그릴라 시내는 나오지 않았다. 어디쯤인지 모를 마을을 여러 개 지나고, 스쿠터를 타고 돌고 있는 중국 젊은 친구들에게 묻고 나서야 겨우 숙소에 도착했다. 중간중간 멈춰서 사진도 찍고, 쉬고, 할머니들의 요리를 구경하기도 했지만 여섯시간은 족히 자전거를 탔다. 태어나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먼 거리를 자전거를 탄 셈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젊은 친구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고 무사히 잘 다녀온게 뿌듯했다. (다녀온 경로를 주인장에게 말하니 본인이 알려준 경로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다녀온 길이 본인 생각으로 4,50킬로는 족히 될거라고 했다. 길을 모르고 무작정 덤벼들었다가 손발이 아니고 엉덩이가 엄청 고생했다.)


사실 비타하이는 볼만한 것이 없다. 호수로서도 주변 경치로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전거 하이킹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무척 즐거웠다. 부끄러움을 심하게 타던 티벳 아주머니와 야크젖을 정성들여 끓여주던 할머니, 우리를 보고 '짜요'를 외치던 사람들(처음엔 놀리는 줄 알았다), 길을 물어보면 성의껏 답해주던 사람들... 이들이 비타하이의 매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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