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새벽녁, 밤새 놀다지쳐 잠든 도미토리 여행자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짐을 챙겨서 숙소를 나섰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한참 가다보니 뿌옇게 밝아오다 해가 떠올랐다. 마지막 여행지로 떠나기 때문인지 그날따라 유독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싱숭생숭한 마음도 고픈 배는 어쩌지 못하는지 공항 푸드코드에서 일본 라면을 먹었다. 오클랜드는 여름에도 새벽녘에는 쌀쌀했기 때문에 뜨끈한 것이 먹고 싶었다.


늘 그렇듯이 뉴질랜드를 떠나는 날은 다른 날보다 화창하게 맑았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등장인물들로 재미나게 구성한 뉴질랜드 항공사의 기내방송


미국 LA에서 뉴질랜드 오클랜드로 올때, 오클랜드에서 시드니로 갈때 뉴질랜드 항공사를 이용했는데 이 항공사의 기내방송이 무척 재미있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촬영장소이자 감독 '피터 잭슨'의 고국답게 기내방송에 '반지의 제왕'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실제 연기했던 배우들은 아니고 간달프, 골룸, 레골라스 등으로 분장한 승무원들이 등장한다. 안전수칙, 비상상황 대처요령을 설명하는 기내방송은 어느 항공사나 비슷하기 때문에 탑승객들이 보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 기내방송은 등장인물들이 상황에 맞춰 연기를 하기 때문에 꽤 재미있다. (진짜 피터 잭슨인지 그와 비슷한 인물도 잠깐 등장한다.)


포털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보니 뉴질랜드가 '반지의 제왕'의 무대로 알려진 뒤에 뉴질랜드를 찾는 관광객이 증가했다고 한다. 여행하던 시기가 영화 '호빗' 첫편이 개봉할 무렵이었는데 그 뒤에 '호빗'을 이용해 다시 기내방송을 만들었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 내용에 대한 우리나라 언론의 기사제목이 '호빗이 기내방송... 영화 우려먹는 뉴질랜드 항공' 이었다. 남이 잘하는걸 배아파하는 꼴이다. 우리나라 항공사들은 우려먹을 것이 있는지나 찾아봤을까, 매출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기내방송을 바꿀 생각이나 해봤는지 궁금하다.


여행하는 동안 거의 볼 수 없었던 우리나라 국적기를 뉴질랜드에서 보았다. 당시에는 반가워서 찍었는데 그뒤 땅콩회항 사건이 나고 그룹일가의 '갑질'이 불거지면서 기피 항공사가 되었다.

앞으로 대한항공을 탈 일은 없을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곧게 뻗은 해안선을 따라 흰색 포말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보고있으니 자연의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비행기 창밖으로 나폴리, 히우 지 자네이루와 함께 세계 3대 미항이자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인 시드니가 보였다. 복잡한 해안선이 아름답게 펼쳐져있긴 했지만 생각보다 빽빽하게 들어찬 빌딩과 집들이 조금은 숨막히게 보였다.


구불구불한 만에 빽빽하게 들어찬 요트들을 보니 교통체증이라도 생길 것 같다.


하늘에서 본 오페라 하우스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난감한 상황에 부딪혔다. 연말연초는 호주 사람들에게 최대의 휴가철이어서 시드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나 저렴한 숙소들에 남는 침대가 없었다. 공항에 있는 여행자 인포메이션을 통해 알아봐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인포메이션에 앉은 여자 안내원은 불친절했다. (영어에 서투른 여행자가 영어권 국가에서 종종 겪는 일이다. 영어권 국가 사람들은 영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모른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비영어권 사람들끼리도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려고 관심어린 눈으로.상대의 표정을 읽는데, 영어권 국가에서는 이런 친절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하고 시드니에 도착한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 중에는 한국인 여행자들도 있었다. 어디선가 공항 직원이 나타나서 자기가 아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를 소개해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다행히 한국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연결되었고, 픽업을 나오기로 했다. (공항직원은 게스트하우스 주인들에게 소개비를 받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의 친절을 감사하며 받아들였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도착한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첫인상이 무척 좋았다. 승합차에 사람들을 태워 데려가면서 시드니의 신년축하 불꽃놀이가 세계 3대 불꽃놀이라며 어제 도착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둥, 시드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분위기를 좋게 만들었다. 다분히 정치색을 띈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되도록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그 성향이 꽤나 맞았기에 호감도가 높아졌다. 하지만, 도착한 게스트하우스 상태와 바가지 요금을 보고 그 호감도는 단번에 사라졌다. 그는 단지 여행자를 속여서 장사하는 속물 장사꾼일뿐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여행자들을 매니저에게 인수인계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뒤로 이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일단 방을 보여주기 전에 입구에서 미리 방값을 지불하게 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런 경우는 없었다. 요금을 선불로 받기는 하더라도 방을 보여주고 여행자가 선택하도록 하는데 요금을 내고 방에 가던가 아니면 나가라는 식이었다. 게다가 요금도 성수기라며 정확히 평소 요금의 두배를 요구했다. 이때 게스트하우스의 상태가 엉망임을 처음에 알아차리고 나왔어야했다. 성수기라 갈만한 숙소가 없을거라는 생각과 설마 한국인 주인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숙소를 운영하며 뒤통수를 치겠는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해버렸다. 사흘치 요금을 지불하고 머무르기로 했다. (가격은 물가가 높기로 악명높은 스위스의 게스트하우스보다 훨씬 비쌌는데 시설은 관리하지 않는 공공화장실과 특급호텔 화장실만큼 차이가 났다.)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이름도 모른다. 이름이나 있는지, 등록은 된 숙소인지도 의심이 든다.) 이 숙소에 대해 길게 쓸 마음도 없다. 매트리스에는 구멍이 다섯군데쯤 나 있었고, 그 구멍으로는 끊어진 스프링이 튀어올라와 몸을 찔렀다. 다음날 이상하게 몸 여기저기가 아파서 보니 스프링이었던 철사가 매트리스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숙소는 전등도 제대로 없고 청소는 전혀 되지 않는지 카페트에는 온통 음식물 쏟은 자국과 여러가지 얼룩이 수없이 있었다. 무엇보다 최악이었던 것은 빈대가 많아서 몸 수십군데를 물린 것이다. 빈대에 물린건 두번째였는데, 빈대에 물렸다니 본인이 운영하는 숙소에서 물린 것도 아님에도 병원에 연락해 의사를 불러준 아르헨티나의 숙소주인에 비해 이 한국인 숙소는 아무런 조치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빈대에 물리거나 죽은 빈대를 발견했던 몇몇 숙소들에 비해서도 이곳의 청소상태는 최악이었다. 


이틀 후, 선불로 지급한 사흘치 방값에서 하루치를 포기하고 나가면서 빈대에 물렸다고 하니 매니저는 '아, 그랬어요? 그러게 좀 더 비싼 방을 쓰지 그랬어요.' 란다. 기가찼다. 첫날 픽업을 했던 주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런 의욕도 없어 보이는 (혹은 착취당하고 있는) 매니저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시에 찍어 둔 숙소의 지저분한 사진(매트리스를 뚫고 튀어나온 스프링과 빈대들이 터진 핏자국)들이 있지만 여기에 올리면서 다시 그때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


캄캄하고 지저분한 숙소에 머무르기 싫어서 새벽에 일어나 비행기를 타고 도착해 피곤한 몸을 억지로 끌고 밖으로 나왔다. 습하고 깜깜한 숙소와 반대로 밖은 뜨겁고 강렬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해일가. 이 말만큼 중국인들의 현지화 능력(속된 말로 장사꾼 기질)을 잘 나타내는 말도 드물 것 같다.


숙소에서 시드니 항구쪽으로 걸으면 차이나타운이 나왔다. 중국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그들이 사는 지역에 붉은색 문을 세워 그곳이 차이나타운임을 알린다. 유럽에서도, 남미에서도 차이나타운은 말그대로 커다란 타운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에는 굳이 자신들의 지역임을 알리고,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런 모습이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았다. 현지에 녹아들지 못하고 자신들끼리 무리지어 사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건 중국인들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어설픈 판단이었다. 중국인들만큼 현지 문화에 잘 녹아들면서도 자신들의 문화도 잘 계승하는 민족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민족들은 다수가 포함된 그 지역의 문화에 쉽게 융화되어 버리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겉돌거나 둘 중에 하나인데 중국인들은 오히려 자신의 문화를 주위에 녹여 퍼뜨린다. 놀라울 정도로 현지 적응을 잘하는 사람들이다.



여러가지 문화 중에서 가장 쉽게 타문화에 녹아들 수 있는 게 식문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국 음식들은 엄청나게 비싸보이는 해산물부터 10달러 미만의 면요리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현지 호주인과 중국인부터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까지 다양했다. 근처에는 한국음식점도 몇몇 군데 있었지만 현지화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일단 음식을 파는 대상이 시드니에 있는 한국 기업의 주재원들이나 한국에서 온 패키지 관광객으로 보였다. 가격은 엄청나게 비싸서 한국 생맥주 피쳐와 치킨 한마리가 50달러 이상이었다.(도대체 왜 호주까지 와서 하이트 생맥주와 한국식 프라이드 치킨을 먹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되지만...) 심지어 어떤 한국 식당에는 20달러 이하의 메뉴는 없다고 출입구에 붙여 놓고 있었다. 김치찌개나 순두부조차도 2만원이 훨씬 넘는 가격이었다.(당시 환율로는 2만 5천원, 많이 내린 지금 환율로도 17,000원이 넘는다.) 20달러면 호주인들에게도 한끼 식사로 큰 금액일 것이다. 고급화 전략을 쓰는 것도 아닌 일반 식당의 음식가격이 그정도이면 현지화가 될리가 없다. 한국음식은 그렇게 현지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일부 한국사람들을 위한 메뉴로 겉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당시 정부는 한식의 세계화를 한답시고 해외 지하철 광고판에 김치와 불고기를 광고해서 해외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외국의 어떤 나라가 우리나라에서 비싸서 먹기도 힘든 음식을, 혹은 들어보지도 못한 음식을 강남역 지하철 광고판에 선전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음식의 1/3가격에 팔고 있는 중국식당의 면요리. 가까이에 한국음식점이 있음에도 이곳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나를 비롯해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중국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중국의 음식과 문화를 배우게 된다.


호주의 토종 조류인듯한 새가 공원을 어슬렁거리며 먹이를 찾고 있다. 꽤나 큰 새임에도 사람도 새도 서로를 신경쓰지 않았다.







관광객들을 위한 볼거리를 패키지로 묶어 팔고 있었는데 이런 볼거리에 흥미가 없는 나에게 시드니는 매력없는 대도시일뿐이었다.


어두침침하고 지저분한 숙소를 나오면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에 눈이 부시고, 거리는 깨끗하고 사람들은 평온해 보였다. 그렇지만 나에게 시드니는 그 도시만의 독특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밍숭맹숭한 대도시의 느낌이었다.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항구를 따라 난 길을 걸어서 시드니의 랜드마크인 오페라하우스로 향했다.

황아레이에서 나이든 주인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이 든 개 '세이지'와 작별하고 뉴질랜드 여행의 출발점이었던 오클랜드로 돌아왔다. 오클랜드는 살기 좋은 도시이며, 바다와 숲과 공원이 어우러진 멋진 도시라는 생각이지만 여행지로서 인상적이거나 매력적인 도시는 아니었다.(흔한 영어권 국가의 대도시일뿐이다.) 그래도 보름정도 뉴질랜드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번 거치다보니 어느새 익숙해져서 황아레이에서 출발한 시외버스가 오클랜드에 도착했을 때는 현지인들과 섞여 자연스레 도심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특정 나라나 도시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나라의 시스템에 적응이 되면서 한결 편해진다. 그 익숙함을 도시의 매력으로 착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내일 이른 아침에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기 때문에 오후에 오클랜드에 도착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숙소 근처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지나고 밤이 깊어질 무렵,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비상벨이 울렸다. 부분적으로 울리는게 아니라 숙소로 쓰이는 6층 건물 전체에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울렸다. 숙소 매니저나 직원들이 방마다 돌아다니며 밖으로 나가라고 안내하는 통에 조금은 걱정스럽게 밖으로 대피했다. 밖에 나가니 소방차가 들어오고 이내 소방관들이 바쁘게 숙소 건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클랜드에서 묵었던 숙소 건물. 6층 건물의 꽤나 큰 호스텔이었다.


아마도 화재 비상벨이 울린 모양인데 밖에서 보니 연기도 불빛도 보이지 않아서 안심했다. 누군가 잘못 눌렀거나 오작동한 모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문제가 없어 보이고 화재가 발생했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았음에도 모든 숙박객을 대피시켰다. 그리고 비상벨이 울리고 소방서에 신고가 된 이상에는 소방관들이 들어가서 이상이 없는지 건물 전체를 점검하고 확인한 후에야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어떤 절차로 진행되는지 잘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누군가 화재 비상벨을 건드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한번도 소방차가 출동한 기억은 없다. 먼저 선생님들이 진짜 화재인지 확인하고 소방서에 신고할지를 결정했나보다. 벌써 30년 전이니 지금은 우리나라의 화재경보 시스템도 당시보다는 훨씬 발전하고 체계화 되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안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잘 짜여진 시스템의 힘보다는 소방관들의 희생과 노고에 기대는 면이 많은게 아쉽다.



숙박객들이 영문도 모른채 모두 나와 대기하고 있다.



소방관들의 점검이 끝나고 숙소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 그 날은 2012년의 마지막 날이었고 이미 11시가 넘은 시간이라 오클랜드에서 새해맞이 카운트다운과 불꽃놀이를 볼 수 있다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도심 한가운데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층빌딩 사이로 하늘을 쳐다보며 불꽃놀이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들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0부터 1까지 세고 나서 폭죽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솟아올랐는데 불꽃이 이 부근이 아니라 많이 멀어보였다. 그리고, 터지는 불꽃의 숫자나 크기가 한강 불꽃축제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많이 부실해보일 정도였다. (짐작컨대 불꽃은 오클랜드의 스카이타워 부근에서 터뜨리는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불꽃이 크건 작건, 화려하거 소박하건 상관없이 사람들은 새해를 맞아 주위 사람들과 축하하고 그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친지들과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걸 기념하는데 불꽃이 얼마나 화려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반구에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았다. (위에 찍힌 사진에 털이 달린 두툼한 패딩을 입은 사람의 뒷모습이 찍혔지만 분명히 뉴질랜드의 한여름이었고 대부분은 얇은 옷차림이었다.) 다음날 새벽에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기에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지만 밤새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들어야했다. 숙소 근처의 bar나 술집에서는 젊은 여행자들이 밤새 새해 맞이 파티를 즐기는 모양이었는데 술집에서 나오는 신나는 음악들 중에서 30분에 한번씩은 '강남스타일'이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차분하고 조용했던 뉴질랜드에서의 마지막 날을 소란스러운 가운데 뜬 눈으로 지새고 마지막 여행지 호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황아레이를 처음 관측한 서양인은 제임스 쿡 선장과 그의 선원들이라고 한다. 황아레이가 있는 '브림만'이라는 이름도 이들이 여기서 낚시를 할 때 '브림'이라는 물고기가 많이 잡혀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뉴질랜드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이름이 '제임스 쿡'이었다. (남미에서 시몬 볼리바르나 호세 산 마르틴처럼 어느 도시를 가도 제임스 쿡이라는 이름이 꼭 등장했다.) 오세아니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탐험한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위키백과에서 찾아본 이 사람의 항해가 실로 만만치 않았다. 제임스 쿡으로 인해 더 이상 미지의 땅(유럽인들 기준으로)이 남지 않게 되었고 대항해시대는 막을 내리고 식민지주의와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위키 참조) 그런 역사와는 상관없이 황아레이에서의 이튿날도 아무 계획없이 이곳저곳 발길 닿는대로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새벽에는 또 비가 내렸는지 바닥이 젖어있었지만 다행히 더 이상은 내리지 않았다. 선착장에서 여러가지 요트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요트들 사이로 뭔가 지나가는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남자 둘이 바다쪽으로 튜빙을 하고 있었다. 요트들 사이로, 그닥 깨끗해 보이지 않는 물에서 그다지 튜빙을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도 둘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튜빙하는 사람을 따라 바다쪽으로 걷다보니 작은 보트를 타고 있는 노인 커플을 보게 되었다. 보트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개 한마리가 타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뒤편에 편안히 기대어 유유자적하고 있고 할머니가 노를 젓고 있었다.





황아레이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숙소의 정원, 사람 손길을 무척 좋아하는 늙은 리트리버 '세이지'(이름이 생각났다.), 우아한 고양이들 밖에 없다. 황아레이가 계획하고 간 곳이 아니기도 했지만 비단 황아레이의 문제가 아니라 뉴질랜드 북섬에 더 이상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뉴질랜드 여행계획을 세울 때 무리가 되더라도 남섬으로 내려가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대신 뉴질랜드의 대형매장(PAN'n SAVE)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저렴하고 신선한 유제품과 과일들이 쌓여있고, 갖가지 빵과 머핀들이 우리나라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뉴질랜드 북섬 여행은 클라이막스 없이 그대로 막을 내렸다. 이제 오클랜드로 돌아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호주로 간다.



이틀만에 파이히아를 떠나게 되었다. 가족단위 여행객이나 콘도나 리조트에서 장기로 머무르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곳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매력적인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떠나는 날은 대부분 그렇듯이 그날도 날씨가 맑았다.


뉴질랜드나 호주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캐러밴을 몰고 여유로운 일정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는 것이다. 국토가 넓으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들은 오히려 대중교통이 그다지 잘 되어있지 않아서 다니기가 쉽지 않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은 국가들은 현지인들이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에 질은 좀 떨어지더라도 곳곳에 버스가 다닌다. 교통편이 없다면 물가라도 저렴하니 택시를 이용해 볼 수 있는데 이런 곳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다. 직접 차를 몰지 않으면 가기 어려운 곳들, 갈 수 있더라도 불편한 곳들이 오히려 많다. 





이 날은 바람마저 불지 않아서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했다.


바닷가 근처에 있던 관광용 헬기. 마침 관광객을 싣고 이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파이히아에서 오클랜드로 가는 버스는 나를 황아레이 외곽에 내려주고는 떠나버렸다. 게다가 이 도시는 생각보다 커서 배낭을 메고 숙소까지 걸어가기에는 무리였다. (지금까지 구글맵에 'Whangarei, 왕가레이'라고 나와서 그런 줄 알았는데 위키백과에는 '황아레이'라고 하고 있었다. 구글맵 지명은 잘못된게 종종 있어서 지금부터는 '황아레이'라고 하려고 한다.) 길가에 있는 여행사인지, 여행자센터인지 모를 곳에서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숙소에 전화를 했고 숙소 주인이 이곳으로 픽업을 오기로 했다.


픽업은 한참 후에야 왔고, 온 사람은 사람좋게 생긴 백발 노인이었다. 이 노인이 운영하는 숙소는 자기 주택에 남는 방을 여행자에게 빌려주는 것이었다. 집이 꽤 넓어서 여행자들이 사용하는 주방과 거실이 따로 되어 있었고, 뉴질랜드의 흔한 목조주택이라 낡긴했어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현지인이 사는 주택에서 묵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다. 황아레이에서는 특별히 하려는 일정도 없었고 뉴질랜드를 떠나기 전에 쉬어간다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보내기로 했다. 숙소 정원에서 꽃과 고양이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분홍생 발바닥... 매력적인 고양이...



불러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더니 잠이 오는지 점점 고개가 아래로 떨어진다.



잠깐 다른 곳을 보다가 눈을 돌리니 어느새 꿀잠 중이다.


뉴질랜드의 흔하디 흔한 꽃, 수국



초여름이라 아직 포도가 익지 않은게 아쉽다. 정원은 꾸민듯 꾸미지 않은듯, 깔끔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자연스럽게 가꿔져 있었다.





직전 여행지였던 멕시코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막바지에 여행한 곳임에도 뉴질랜드에서 남아있는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비싼 물가와 불편한 교통, 그다지 색다를 것 없는 문화가 한 몫했으리라 싶다. 그래도 황아레이에 묵었던 숙소는 꽤 기억에 남는다. 백발의 숙소 주인과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안주인(젊었을 땐 유명한 다이빙 전문가이자 수중 사진 촬영가라고 했다. 숙소 거실에 그녀가 찍었다는 수중생물 사진과 사진집이 여러 권 있었다.), 사람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나이든 리트리버(주인 뒤를 졸랑졸랑 따라다니다 주인이 상대해주지 않으면 다가와서 내 손에 자기 머리를 갖다댔다. 스다듬어주고 잠시 손이 멈추면 다시 머리를 손에 부빈다. 사람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리트리버라도 이 정도인 녀석은 처음이었다. 블로그 프로필 사진에 있는 녀석이 그 녀석이다.) 관리하지 않은 듯 잘 관리된 정원, 여러 마리의 고양이, 걸으면 삐걱대고 조금은 퀘퀘한 냄새가 나는 낡은 목조건물... 황아레이에서 머물렀던 이틀동안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 숙소만 기억에 남는다.

다음날 파이히아 선착장으로 나갔다. 날씨는 화창까지는 아니더라도 햇볕이 제법 내리쬐이고 있었다. 좀 더 맑았으면 좋았겠지만 뉴질랜드에서는 구름이 거의 없는 맑은 하늘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이정도 날씨도 다행이었다 싶다. 선착장 근처에는 아침부터 출항을 준비하는 요트들이 제법 있었다.


화려하고 값비싼 요트들이 많기로는 터키 보드룸, 그리스 코스나 로도스, 산토리니 같은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이 압도적이지만 그 요트들은 크기도, 가격도 도저히 욕심내 볼 수 없는 수준이라서 부자들의 장난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은 그렇게 크고 화려한 요트들이 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살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빌려 볼 수는 있지않을까?




파이히아에서 가까운 섬으로 가는 동안 다들 갑판에서 햇볕을 쬐며 바다를 구경한다.내가 탄 요트는 조금 오래된 것 같지만 기계동력을 많이 쓰지 않아서 조용했다. 투어를 하는 배들 중에는 신형 보트나 쾌속선처럼 생긴 배들도 있었지만 오클랜드에서 바람의 힘으로만 가는 요트를 타 보고나서는 빠르진 않더라도 이런 요트를 타고 느긋하게 다니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이 배의 투어를 신청했다.


쟤는 늘씬한게 제법 빨라보인다.


벌써 3년도 더 지난 일이라 정확한 기억인지 자신은 없지만, 기억대로라면 이 투어는 부부가 진행을 하고 요트도 이 부부가 운행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자가 나와서 간단한 설명을 했다.



선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오늘 투어의 최연소 참가자가 나를 매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감히 제대로 카메라를 들이대지는 못하고 몰래 사진을 찍었다. 저 아기의 나이라면 우리나라 부모들은 밖에 나오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할텐데 배를 타고 투어를 하고 있었다. 여행 다니며 여러번 느낀 바지만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 조심스럽게, 너무나 안전하게만 키우려하는건 아닐까...




화창하게 맑은 날씨는 아니지만 다양한 모양으로 떠 있는 구름 덕분에 갑판에 누워 하늘을 보는데 지루하지 않았다.


투어들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정확히 뭘하는지 모르겠지만 보트 옆에 달린 그물에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돌고래가 보인다는 신호가 울리면 그쪽으로 배를 몰고 다가가는 것 같았다. 운이 좋지 않았는지 나는 이 날 돌고래를 볼 수 없었다.


최신형의 호화 요트보다 이런 작고 클래식한 모양의 요트가 멋있어 보인다.



오늘 투어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해가 뜨고 한낮이 되니 구름이 옅어지고 하늘도 조금 더 맑아졌다. 카약을 타던, 스노클링을 하던, 해변가에서 일광욕을 하던, 요트에 남던 본인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다만 요트가 정박할 수 없기 때문에 섬으로 가려면 카약을 타고 가야한다. 나는 지쳐버리기 전에 카약을 하기로 했다.





섬 근처의 바닷물은 파이히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맑고 깨끗했다. 강이나 호수에서는 몇 번 경험이 있지만 바다에서의 카약은 처음이라 약간 걱정이 되었는데 파도가 세지 않아서 금새 적응이 되었다. 카약을 타고 섬 근처를 배회하다가 지루해지면 스노클링을 했다. 이곳에서의 스노클링에서 바닷속에서 산호나 열대어를 기대하면 안된다. 그냥 물놀이로 즐길뿐이다.  스노클링을 한 뒤부터는 제대로 찍은 사진이 없다. 분명 여기서 점심을 먹고 정오가 한참 지나서 파이히아로 돌아갔는데 점심식사가 투어에 포함되어 있었는지 만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후가 되자 날씨가 더 맑아졌다. 물놀이에 지친 사람들은 갑판에 누워서 일광욕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나도 사진을 찍고 바다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파이히아 항구로 다시 돌아왔다. 날씨가 좋아졌음에도 항구 근처의 바닷물은 맑아지지 않았다. 파이히아는 뉴질랜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바닷가라고 해서 기대하고 갔지만 성수기로 꽤나 높았던 숙박비와 투어를 하지 않으면 할 것이 그닥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트와 카약을 탈 수 있었던 이 날의 투어도 나쁘진 않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멕시코 코수멜에서의 스쿠버 다이빙 1일 비용보다도 투어 비용이 더 비쌌다. 양국의 물가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에 오기 직전까지 머무르고 있던 곳이라 비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뉴질랜드와 호주는 생략하고 멕시코에서 다이빙이나 하고 저렴하고 맛있는 멕시칸 요리나 실컷 먹으며 유유자적할 걸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파이히아에서 실망하고 계획한 날짜보다 먼저 떠나기로 결심했다. 어디가 좋은지 정보도 없이 지도를 보고 궁리하다가 파이히아에서 오클랜드로 내려가는 방향에 있는 왕가레이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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