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잠들기전에 날씨를 확인하러 숙소 마당에 나오니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좋았던 날씨가 하루 사이에 이렇게나 바뀌다니 머리로는 '역시 고산지대라 그런가보다'하고 이해하려 했지만 마음으로는 '왜 하필 그 날이 오늘이냔 말인가'하는 불평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입장권을 끊어놓은 것도 아니라서 날씨가 너무 좋지않으면 옥룡설산을 포기하려 했다. 리장에 있는 마지막 날이니 미룰 수도 없었다. 여행이란게 원래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부랴부랴 날씨를 확인하니 다행히 비는 그쳐 있었고 하늘도 생각보다 흐리지 않았다. 밤사이에 날씨가 또 바뀌었으니 설산을 오르는 중에 맑아질 수도 있을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어제 사둔 간식거리와 물을 챙겨서 숙소를 나섰다.
'나쁘지 않아, 괜찮아질거야' 그랬는데...
위룽쉐산(옥룡설산)으로 가려면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하루에도 엄청난 관광객이 몰리는 국가 최고등급의 관광지에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여튼 거기에 가기 위해서는 여행사를 통해 관광버스를 타거나, 소위 빵차라고 부르는 빠오처(包車, 전세차)나 미엔빠오처(面包車, 승합차) 이용해야 한다. 리장시내에서 위룽쉐산 사이를 다니는 7번 미엔빠오처는 모택동 동상이 있는 인민광장 건너편에서 탈 수 있다.
아침 일찍 7번 미엔빠오처를 탈 수 있다는 곳으로 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과 차들로 붐비고 있었다. 하지만 오는 순서대로 차에 태워서 만차가 되면 출발하는 구조라서 타라는 차에 그냥 타고 있으면 된다.
운이 좋았는지 새 차에다 승객중에 덩치가 큰 편이라서 앞자리를 배정 받았다.
차가 출발하고 금방 도착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먼저, 위룽쉐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방한복과 산소통을 파는 가게에 들른다. 위룽쉐산 명승구 내에서도 빌릴 수 있는데 외부가 싸기 때문인지 위룽쉐산으로 가는 길에는 그런 가게들이 무척 많았다. 게다가 같이 탄 승객들은 들른 가게의 가격이 비싸다 싶으면 다른 가게로 가자고 기사에게 요구해서 두세번을 들러야했다. (우리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다.)
몇 군데의 가게를 들르고나서 승합차는 다시 어딘가 건물이 있는 곳에 멈췄다.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 몰라서 차안에서 멀뚱멍뚱 기다리고 있었더니 위룽쉐산 케이블카 표를 파는 곳이라고 빨리 내려서 표를 사라고 했다. 위룽쉐산은 아직 보이지도 않는데 표를 파는 곳이라니 뭔소린가 싶었는데 매번 이해할 수 없는, 입장하는 곳과 매표소가 한참 떨어진 그 구조가 여기도 반복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지만 사람들은 줄을 엄청 길게 서 있었고, 줄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맨 뒤에 서서 왜 줄이 안줄어드는지 지켜보니 사람들이 자꾸 앞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돈과 신분증을 보여주고 표를 사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심지어 단체 관광객 가이드로 보이는 사람은 수십명 분의 신분증과 돈뭉치를 건네기도 했다. 아직도 새치기를 떳떳하게 한다더니 아무말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이 바보인거다. 다들 그렇게 새치기하니 따지는 사람도 화를 내는 사람도 없었다. 어떻게하나 난감해하고 있던 차에 승합차를 같이 탄 젊은 중국커플이 나를 끌고 자기들이 먼저 와서 서 있던 자리에 밀어넣었다. 이런 떳떳한 새치기에 적응을 못한 내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괜찮다는 표정으로 답을 했다. 서로 대화가 전혀 안되는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 묘한 동지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200위안에 가까운 돈을 주고 케이블카 탑승권을 샀다. 그런데 여기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탑승권마다 30분 단위로 시간이 찍혀 있어서 그 시간이 아니면 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칫 그 시간을 놓치기라도 하면 다시 사야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케이블카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기다리는 걸 예방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보니 어차피 기다려야 하는건 마찬가지라 별 의미가 없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케이블카를 탔지만 탑승시간이 정해져 있는 케이블카는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7,80년대 버스터미널이 이랬을까?
어쨌든 표를 사고 승합차에 다시 올랐다. 조금 더 가서 도시 외곽으로 나가니 소들이 차도로 다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매표소에서 도와준 중국커플은 방한복과 산소통까지 사서 중무장하고 있었는데 얇은 패딩과 바람막이만 입고 산소통도 사지 않은 내가 걱정되었는지 손으로 그것들을 가리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행을 하면서 안데스의 5000미터 넘는 곳에서도 고산병이 없었으니 위룽쉐산에서도 그럴 것 같긴 했지만 자꾸 걱정해주니 스스로도 조금 불안해졌다. 재밌는 것은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한국인과 한국어는 커녕 영어 한마디도 안되는 중국인이 마음을 나누는데는 표정과 손짓이면 충분했다는 것이다. 여행에서의 이런 경험은 나중에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위룽쉐산 풍경구에 들어오기 직전에 검문소에서 다시 100위안을 내라고 했다. 왜 내야하는지도 모르고 일단 내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돌아갈 수도 없고 중국 공무원들한테는 따져봐야 통하지 않는다는걸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순순히 100위안을 내야했다. 중국 관광지는 외국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삥을 뜯는 것 같다.
승합차 기사와 걱정해준 중국 커플. 블로그를 볼 일이 없을테니 얼굴 공개
위룽쉐산 풍경구 입구.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는게 아니라 기다렸다가 케이블카 탑승 시간이 되면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중국인 커플은 내가 불안했는지 케이블카 타는 곳을 왕복하는 셔틀 승차장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 눈치로 뻔히 저기서 타면 되는걸 알면서도 나보다 한참 어린 이 친구들의 친절이 고마워서 오히려 돌아가고, 시간이 더 걸렸어도 기꺼이 따라다녔다. 이들의 친절을 받는 것도 이제 끝이났다. 바로 이어서 표를 샀음에도 친절한 중국인 커플과는 케이블카 탑승시간이 달라서 여기서 헤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날까지 중국여행을 하면서 중국에 대한 호불호는 부분에 따라 크게 갈렸다. 개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회시스템, 전체적인 서비스 의식부족, 과도한 상업화는 중국에 와서 실망한 부분이지만 중국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여행 전보다 좋아졌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휴가라서 불편했을거라며 100위안하는 콜택시를 대신해 자기 차로 데려다준 홍콩영화 조폭처럼 생긴 숙소 사장님, 두세번 가면 알아보고 아는체하는 직원, 주문할때 나도 모르게 나온 한국말을 따라하며 쑥스럽게 웃는 식당 아주머니, 그리고 이날 자기들 자리에 나를 세워주고 길 안내를 해준 젊은 친구들까지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 까닭이다. 이런 경험은 나중에 다시 중국을 찾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된다. 치안이 불안한 남미를 다시 찾는 이유, 덥고 비위생적인 동남아를 다시 찾는 이유는 거기에 사는 사람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사람의 매력에 빠져야 그 나라에 다시 가보고 싶고, 더 깊이 알고 싶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관광정책을 돌아보면 한심할 정도다. 방문하는 관광객의 숫자에 목을 매면서 불친절, 바가지요금, 특색없는 관광상품은 개선할 생각을 하지않고 겨우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같은 행사로 외국인 관광객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본다면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 숫자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화장품 같은 몇몇 품목을 제외하고 쇼핑에 있어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경쟁력이 전혀 없음에도 거기에만 집착한다. 이들을 다시 찾아오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에 있다.
탑승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위룽쉐산은 완전히 구름에 잠겨 있었다.
구매한 케이블카 탑승권에 찍힌 시간은 10시 30분이었다. 20분쯤 되자 출입구를 통제하고 있는 직원이 표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대기하던 건물 뒤편으로 나가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셔틀버스였다. 이 셔틀을 타고 산중턱을 올라가야 케이블카 탑승장에 도착한다. 중국의 관광지 시스템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대여하는 방한복들은 대부분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 색이다.
알프스에서는 케이블카가 구간별로 나뉘어져 있어 가장 높은 곳까지 가려면 여러 번을 갈아타야했는데 위룽쉐산의 케이블카는 한번에 올라갔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기 시작한지 얼마되지않아 잔뜩 낀 구름과 내리는 비로 바깥 풍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날씨가 나빴다.
드디어 케이블카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해발 4500미터에 도착했다. 빠른 속도로 오르다보니 압력차 때문에 귀가 조금 막히고 머리는 멍했다. 이럴 때는 급하게 움직이지 말고 몸이 적응할 수 있게 가능한 천천히 움직여줘야 한다. 각자 기압차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르다보니 케이블카에 내리자마자 구토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케이블카를 내린 곳(4500미터)에서 사람들이 갈 수 있도록 허가된 가장 높은 전망대(4680미터)까지는 걸어서 가야한다.
안그래도 고산지대라 숨이 빨리 가빠오는데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서 힘들었다.
산 정상부근은 눈이 내리고 있었고, 가까운 산들도 희미하게 보일락말락 했다.
나시족의 성산인 위룽쉐산은 1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높은 봉우리는 5600미터에 달한다. 이 위룽쉐산과 가까이 닿아있는 산이 하바쉐산(합파설산, 약 5400미터)인데, 이 두 산 사이의 계곡이 세계 3대 트레킹코스라는 후타오샤(호도협)이다. 그리고, 호도협을 흐르는 강이 양쯔강의 상류인 진사장(금사강)이다. 하지만 눈과 구름에 가려져서 아름답다는 설산은 나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지점부터 전망대까지는 불과 180미터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렇게 만만히 볼 수는 없다. 몸이 고산지대에 적응이 안된 상태이기 때문에 조금만 올라도 매우 숨이 가빠진다. 다리는 아프지 않고 몸도 전혀 힘들지 않은데 심장은 쿵쾅거리며 펌프질을 하고 입은 절로 벌어져서 부지런히 공기를 들이마신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고산병일 걱정은 없으니 다행이다. 천천히 가면서 숨이 가쁘면 쉬었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하면 된다. 고산증세가 심한 사람은 우선 머리가 매우 아프기 때문에 무리해서 오르려 하지말고 일행이 다녀오기를 기다리거나 증세가 심하다면 바로 내려가는 것이 좋다.
이제 슬슬 끝이 보인다. 날씨가 맑았다면 멀리 있는 봉우리가 훌륭한 장관을 보여주었을텐데...
하늘이 조금 맑아지는 듯해서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이때가 그 날 위룽쉐산에서 가장 좋은 날씨였다.
위룽쉐산의 만년설과 빙하
4680미터 전망대에 도착했다. 안데스에서 5000미터 넘는 곳도 갔었고, 4000미터대에서 트레킹도 했었지만 그때는 고산지대에 적응이 되었을 때라 배낭을 매고도 잘 다녔었는데 여기서는 겨우 180미터를 오르는데도 무척 힘들었다. 게다가 눈이 오니 계단이 무척 미끄러워서 넘어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렇게 힘들게 왔지만 하늘은 여전히 맑아지지 않았다.
불과 180미터 아래에 있는 출발지점이 눈과 구름으로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다.
예전에 지하철역사에 종종 있었던 델리만주 매장이 위룽쉐산에 있었다. 중국브랜드였나?
날씨는 춥고 배도 고파서 따뜻한 커피를 시켜서 가져간 빵과 같이 먹었다. 아메리카노를 줄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내준 것은 커피믹스였다.
다시 내려왔더니 케이블카를 타려는 줄이 엄청나게 길어져 있었다. 이럴거면 케이블카 탑승시간은 뭐하러 정해놓은거지?
위룽쉐산은 산이 크고 높다보니 모우평, 운삼평, 백수하 등등의 볼거리가 있는데 이곳에 가려면 케이블카 탑승장에서 버스를 타야했다. 버스를 타고 작은 구채구라 불리는 백수하로 갔다. 거기서 다른 곳으로 가는 케이블카로 갈아타야한다.
오오~ 물빛이 장난이 아니네! 옥빛 물빛이 한껏 기대하게 만들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 중국 관광지는 다시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백수하 근처에서 하차장을 만들면 될 것을 굳이 윗쪽에 만들더니 다시 50위안이나 내고 백수하만 운행하는 전기셔틀을 타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걸어가려고 했지만 인도는 없는데다가 워낙 도로폭이 좁고 셔틀이 꽤나 빠르게 지나다녀 위험했다. 화가 나서 속이 쓰릴 지경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백수하의 물빛이 예뻐서 기분이 좀 풀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멀리 보이는 폭포가 좀 이상하다. 마치 장난감인듯...
어라, 터키 파묵칼레처럼 보이는 이곳도 뭔가 인공미가 느껴지네
잠깐이나마 백수하의 물빛을 보고 반한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 백수하는 위룽쉐산의 물길을 막아 만들어 놓은 인공의 유원지일뿐이었다. 그러고보니 이 물조차도 위룽쉐산에서 내려오는 물인지 의심스러워졌다. 고작 물길을 막아 만들놓은 이런 풍경을 보려고 돈을 내고 여기까지 온게 후회스러웠다.
물안에서 죽은 고목도 인공적으로 물을 가두고 물길을 넓히면서 죽게 된 것으로 보인다.
만들어진 경치라는 것을 알고나자 전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제법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웨딩촬영을 하고 있다.
만들어놓고 별이 다섯개라고? 흥,칫,뿡이다.
실망을 거듭하던 와중에 결정적인 것을 보고 말았다.
사람이 일부러 만든 경치였다는 확실한 근거를... 그런데 여행책자에도 인터넷 블로그에도 그렇다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모우평이나 운삼평에 가려면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야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다. 돈을 들여 갔는데 또 인공미 좔좔 흐르는 그런 경치를 보여주지나 않을지도 걱정이었다. 백수하에서 충분히 실망하고나니 다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여기까지 오는데 쓴 돈만 500위안에 가까웠다. 위룽쉐산은 산 전체가 거대하고 값비싼 유원지일뿐이었다. 다시 7번 승합차를 타고 리장시내로 돌아왔다.
시내 날씨는 이렇게 좋은데 산에는 눈과 비바람이 뿌려대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위룽쉐산으로 가는 승합차를 탈 수 있는 인민광장
위룽쉐산에서 돌아와 실망스러운 기분을 달래기 위해 맥주를 한잔 하기로 하고 인테리어가 마음에 드는 조용한 까페에 들어갔다. 메뉴를 보니 라오스에서 줄창 마셨던 비어라오가 있었다. 달콤하고 쌉쌀한 맥주가 들어가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천천히 조금씩 시간을 들여 맥주를 마시다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오늘도 리장꾸청내 스팡지에에는 사람과 음악소리가 넘쳐난다.
리장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지나갔다. 리장은 내가 상상하던 리장이 아니었고, 위룽쉐산도 기대했던 위룽쉐산은 아니었다. 리장은 그냥 관광객으로부터 돈을 벌기 위한 거대한 상업지구일뿐이다. 그나마 만났던 친절한 사람들이 오늘의 유일한 성과였다. 내일은 이번 여행의 또다른 목적지인 후타오샤로 떠난다. 제발 후타오샤에서는 이런 실망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