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희랑'(샹그릴라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샹그릴라에서의 첫날은 자희랑 주인장이 소개해 준 중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에서 묵었다. 멋들어진 목조건물에 시설도 나쁘지 않았고, 비싼편도 아니었는데 숙소는 텅비어있었다. 어젯밤에는 자희랑에서 술자리를 가진 후 숙소에 늦게 들어와서 몰랐는데 이 넓은 숙소에 달랑 우리 일행 셋만 있었다. 어찌된게 중국인 주인도 사업에 흥미가 없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으례하는, 여행자에게 자신의 숙소에 대해 좋은 후기를 남겨달라는 둥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숙소는 훌륭한 편인데 손님이 아무도 없다. 스릴러물이라도 찍으면 좋을 듯...



샹그릴라라는 말의 기원은 위키백과의 설명을 그대로 옮긴다. 


샹그릴라(Shangri-La)는 제임스 힐튼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3)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가공의 장소이다. 쿤룬(Kunlun)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있는 숨겨진 장소에 소재하는 신비롭고 평화로운 계곡,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외부로부터 단절된 히말라야의 유토피아로 묘사되었다. 소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말은 지상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천국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샹그릴라 사람들은 평균적인 수명을 훨씬 뛰어넘어 거의 불사(不死)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상상에서 우러난 동양(Orient)에 대한 이국적 호기심(Exoticism)을 담고 있다. 샹그릴라 이야기는 티베트 불교에 전승되는 신비의 도시 샹바라(Shambhala, 香巴拉)에 기초하고 있다.


이상향을 의미하는 샹그릴라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현실에 존재하게 된 연유는 앞의 여행기에서도 썼지만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제임스 힐튼이 상상했던 샹그릴라가 어디인지, 어느 곳이 가장 소설과 가까운 곳인지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중국정부는 원래는 중뎬(中甸)이라는 이름을 가진 디칭티벳족자치주에 있던 현을 '소설에 나오는 이상향이 이곳이다'라고 선포하고 지명을 샹그릴라로 바꿔버렸다. 이곳이 이상향, 도원향일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해발 3100미터가 넘는 곳이라 경치나 분위기가 페루나 볼리비아와 매우 흡사하다.


자희랑 게스트하우스... 흙벽돌로 만든 집과 나무판으로 올린 지붕이 그대로 안데스 어느 마을에 옮겨 놓아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것 같다.

기후가 비슷하고, 주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도 별 차이가 없으니 사람 사는 모습이 비슷해진다.


아침에 일어나니 잠들기 전에는 뜨끈했던 전기장판에 미열만 남아있고 숙소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소개받은 숙소가 이 모양이라며 투덜거렸지만 알고보니 새벽부터 샹그릴라 전역이 정전이라고 했다. 수도는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끊겨 있었다. 몇 년전 샹그릴라 구시가를 뒤덮은 화재로 이곳을 상징하는 오래된 목조건물의 반이상이 전소되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집들이 새로 지어졌거나 짓고 있었고, 수도나 전기도 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이런 일들이 일상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형편이 괜찮은 숙소들은 태양열로 물을 끓여서 숙박객들에게 제공하는데 장사가 안되는 숙소에 묵은 덕분으로 따뜻한 물을 셋이서 넉넉하게 쓸 수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에는 샹그릴라 시내구경에 나섰다. 샹그릴라의 스팡지에에는 티베트 불교를 상징하는 백탑이 서 있다. 백탑의 네 면에는 뭔가가 새겨진 원통들이 붙어 있는데 신자들은 이 통들을 돌리며 탑을 돈다. 동남아에서 봤던 수십개의 작은 종들을 하나씩 치며 소원을 비는 모습과 정확하게 겹쳐졌다.





목조건물들이 늘어선 구시가를 벗어나면 도시가 확장되면서 지어진 새 건물들로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 샹그릴라라는 이상향으로 이름붙은 도시가 일반적인 중국의 소도시와 크게 다를바가 없다니 조금은 실망스럽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구글과 페이스북이 아프리카나 아마존에도 인터넷을 연결하겠다고 열기구를 띄우는 마당에 이들만 내 상상속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이다.



샹그릴라 시내의 한 시장을 찾아 구경에 나섰다. 샹그릴라가 지금까지 여행한 중국의 다른 지역과 차이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때 대부분 티베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쓰는 중국어도 발음이나 억양이 상당히 다른지 중국어에 능숙한 일행도 이들과 대화하는데 약간 어려움을 겪는 듯했다. 간판이나 게시판도 중국어와 티베트어를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말도 글도 다른 이들은 어쩌면 중국이라는 커다란 국가에 속한 또 다른 작은 국가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곳곳에서 소수민족들의 독립을 요구하는 테러나 시위로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자치구라고는 하지만 모든 것을 중앙당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는 정치방식이 소수민족들의 문화와 충돌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수민족들이 거대 자본을 등에 업은 한족들에게 피해를 입는 일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윈난성을 지나 티베트자치구에 이르면 이런 성향이 깊어지는 이유로 중국정부에서는 외국인들의 여행을 금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정부는 소수민족들의 문제를 무력으로 억눌러 왔지만 이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연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샹그릴라의 시장은 우리네 재래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야채나 과일들이 훨씬 큼직큼직하고 싱싱해보였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산 농수산물이 하품으로 취급받는 이유는 중국에서도 하품으로 취급되는 물건을 싸게 들여오기 때문이다.




시설도 나쁘지 않았다. 비를 맞지 않고 장을 볼 수 있도록 커다란 지붕이 덮여 있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과 물건을 펼쳐놓는 공간이 잘 분리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도 오지에 가까운 작은 도시에 있는 시장이 우리네 시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벌어들이는 수입의 절대치는 높을지 모르겠지만 그 수입으로 영위하는 생활 수준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중국하면 돼지고기... 소고기보다 돼지고기가 훨씬 맛있다.





이곳의 아이들은 모두 수줍다. 사진이라도 찍을라치면 수줍게 웃으며 도망가버린다. 카메라를 들기만하면 멋진 모델포즈를 취하는 아이들에 익숙해진 탓에 오히려 이 아이들의 순진함이 반갑다.



샹그릴라 시장을 구경하고 일행 중 한명은 아웃도어 매장에서 두터운 바람막이 점퍼를 아주아주 저렴한 가격에 샀다. 오후에는 자하랑 주인장이 추천한 비타하이(碧塔海, 벽탑해)로 자전거 하이킹을 가기로 했다. 일단 숙소에서 돌아와 자하랑이 자랑하는 야크버거로 든든히 배를 채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해가 뜨기 전의 위룽쉐산을 카메라에 담고, 식사를 했다. 차마객잔에서는 아침으로 국수나 밥류를 사먹을 수 있는데 평소에서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이날은 닭죽이 무료 서비스로 나왔다. 어제 남은 백숙으로 끓였을 가능성이 충분하지만 중국에서 이런 서비스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내가 느낀 중국 사람들은 내면의 친절함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 못지않지만 아직 서비스(비록 상업적인 목적이라 하더라도)에 대한 개념은 부족했기 때문에 심심산골에서 이런 서비스를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닭죽을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이틀째 후타오샤 트레킹에 나섰다.







출발할 때는 쌀쌀했던 날씨가 산봉우리 위로 해가 뜨자 금새 따뜻해졌다. 심지어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게 어제보다 날씨가 훨씬 좋아보였다. 어제는 숲과 오르막을 지나느라 볼 수 없었던 하바쉐산의 봉우리리가 왼쪽으로 펼쳐졌고, 절벽으로는 만년설에서 녹은 물이 작은 폭포를 이뤄 떨어졌다.


출발한지 한시간쯤 되었을까, 중도객잔이 저 앞에 보일때가 되어서야 이번 트레킹을 위해서 샀던 등산용 스틱을 차마객잔에 두고 온게 생각났다. 동행인 젊은 친구는 가지러 가자고 했지만 그러면 왕복 2시간을 허비해야 하고 어쩌면 여기서 나가는 차 시간에 제대로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냥 포기했다. 어제는 트레일이 가파르니 스틱을 요긴하게 잘 썼는데 오늘은 시작부터 트레일이 평지라서 한시간을 걸어도 생각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남미 안데스에서도, 스페인 산티아고에서도 사지 않고 버텼던 스틱을 이번 트레킹을 대비해 맘먹고 샀는데 첫날 하루 쓰고는 잃어버리다니... 꼼꼼하지 못한 내 성격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중도객잔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여행전에 정보를 찾아보면서 중도객잔의 화장실이 천하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화장실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나는 화장실에 가지는 않았지만 중도객잔에서 보는 경치가 특별히 더 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위룽쉐산의 절경과 화장실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합쳐져서 재미있게 만들어진 이야기인 것 같다.



평탄한 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몇 개 돌아서 가다보니 골짜기도 아닌 산허리에서 트레일 위로 물이 떨어지는 작은 폭포가 나왔다. 여행전에 찾은 정보로 관음폭포라 이름붙은 곳인 줄은 알았지만 떨어지는 물의 수량이나 높이나 그다지 인상적인 폭포는 아니다. 다만, 여름에 이곳을 방문한 트레커들에게는 무척 반가운 장소가 될 것 같았다.




점심때쯤 되어서 티나객잔에 도착했다. 티나객잔은 차가 다니는 도로옆에 있어서 마지막 30분 이상은 산을 내려오는 것으로 트레킹이 마무리 된다. 둘째날은 첫째날에 비해 코스가 너무 쉽고 평탄했고, 경치도 첫째날이 훨씬 좋았다. 후타오샤를 상-중-하로 나누는데 대부분은 상에서 중까지 오는 약 22km의 코스가 일반적으로 많이 찾는 코스이다. 트레킹을 마친 사람들은 티나객잔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기 전까지 여기서 쉬거나, 사냥꾼에게 쫓긴 호랑이가 진사장을 뛰어 넘을 때 밟고 건넜다는 호도석을 보기 위해 이 곳에 짐을 맡기고 다녀온다.

 


점심식사를 시켜놓고 더위를 식히고 있으려니 어젯밤 잠깐 봤던 한국사람 둘이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들어왔다. 어제는 인사를 할 겨를이 없었는데 인연이 있나보다 싶어서 인사를 하고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도 나하고 같이 트레킹을 한 동행과 같은 나이였다. 이 두 사람은 고등학교 친구사이로, 세계여행을 시작한지 40여일째라고 했다. 세계여행을 먼저 한 선배로서 무척 반가웠고, 앞으로 펼쳐질 흥미진진한 여행이 부럽기도 했다. 게다가 후타오샤 트레킹을 마치고 나처럼 버스로 샹그릴라로 갈 예정이라고 해서 동행하기로 했다.


넷이서 점심을 먹고나서 트레킹을 같이 한 친구와 티나객잔에서 만난 두 친구는 같이 호도석을 보러 내려가고, 나는 그냥 객잔에서 쉬면서 이들을 기다렸다. 



객잔에는 우리가 산을 내려올때 같이 내려온 젊은 부부와 어린 두 아이가 있었는데, 커다란 오토바이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객잔에 오토바이를 세우자 그 중 딸아이가 오토바이에 타보고 싶다고 아빠에게 수줍게 이야기를 했다. 아빠가 오토바이 여행자에게 딸 아이가 오토바이에 타봐도 되는지 물어보고 승낙을 얻어냈다. 오토바이에 탄 귀여운 여자아이 얼굴이 환하게 웃음꽃이 피었고, 아이의 귀여운 모습에 객잔에 있던 여행자들 얼굴도 모두 환해졌다.


이 젊은 서양인 부부는 이제야 걷기 시작한 한두살된 남자아이와 그보다 조금 큰 여자아이를 데리고 후타오샤에 왔다. 아빠는 엄청나게 큰 배낭에다 여자아이를 데리고, 엄마는 작은 배낭에 남자아이를 안고 트레킹을 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생각보다 코스가 험해서인지 오르던 길을 포기하고 되돌아가다가 우리와 만나게 되었다. 이 작은 아이들을 데리고 트레킹을 강행한 용기도 대단하고, 이 아이들이 불평없이 부모와 같이 다니는것도 놀라웠다. 세계여행을 하면서도 이런 가족들을 종종 봐왔음에도 볼때마다 이들의 사고방식과 교육방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티나객잔에서 호도석에 다녀오는 길은 꽤나 험해서 왕복 세시간쯤 걸린다고 했는데, 한 시간 반쯤 지나자 다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서 돌아왔다. 생각보다 가까웠거나 길이 험하지 않았던 것이냐고 묻자 큰 사고가 생길뻔해서 돌아왔다고 했다. 가파른 길을 내려가던 도중에 한 친구가 부실한 돌을 밟고 절벽에서 떨어뻔하는 순간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잡고 겨우 추락을 면했다고 했다. 얼굴이 벌건 이유가 더워서인줄 알았는데 다들 놀래서 상기된 것이었다. 물을 마시고 한숨을 돌린 후에야 조금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앞으로 1년 가까이 남은 여행에 큰 액땜을 한 것이라고, 앞으로는 더 조심히 다닐테니 잘 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진정시켰다.


호도협을 마친 사람들은 대부분 리장이나 샹그릴라로 가기 때문에 티나객잔에서는 이쪽으로 가는 버스표를 판다. 나와 세계여행중인 친구들은 샹그릴라로, 후타오샤를 동행했던 친구는 리장으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 오후 4시경에 기념사진을 찍고,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계정을 주고 받고는 버스앞에서 헤어졌다. 그런데, 동행했던 친구에게 급하게 이메일 계정을 알려주느라 주로 쓰는 두 계정의 아이디와 이메일주소를 섞어서 이야기해버렸다. 그 친구는 내가 알려준 엉뚱한 계정으로 메일을 보냈을테고, 나는 그 친구의 계정을 알지 못한다. 이 블로그를 볼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혹시라도 보게 된다면, 혹은 H반도체 회사에 다니는 후타오샤 트레킹을 다녀온 서른 두살의 남자를 알고 계신 분은 글을 남겨주시면 무척 고마울 것 같다. 


후타오샤에서 샹그릴라로 가는 중에 휴게소에서... 무슨 설산인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티벳불교의 상징인 불탑과 타르초가 보이는게 점점 티벳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후타오샤 티나객잔에서 샹그릴라까지 4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구글맵에는 100km가 조금 넘는 거리에 2시간 반이라고 나오는데 항상 그렇듯이 훨씬 더 오래 걸렸다. 쿤밍-따리-리장-샹그릴라에 오는 동안 조금씩 도시의 분위기가 달라지는게 독특했다. 전형적인 중국의 대도시 쿤밍, 고도(古都)의 느낌인 따리와 오래된 마을 같은 리장이었는데 샹그릴라는 정말 먼 외지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샹그릴라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도로를 맘껏 활보하고 있는 소들이었다. 주인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지만 소들은 자기들끼리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차들은 그런가보다 하고 소가 지나갈때까지 서행을 하거나 멈췄다. 사람이 지나가려고 해도 좀처럼 멈추는 일이 없는 다른 큰 도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신기해하며 택시를 잡아타고 샹그릴라에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를 찾아갔다.




샹그릴라의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숙소는 한국인들도 있지만 서양 배낭여행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지금껏 가본 한국인 숙소는 대부분 한국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여행자들이 묵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게스트하우스로는 당연한 모습이지만, 가장 마케팅하기 좋은 한국인 전용숙소가 아니라 서양여행자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게스트하우스로 자리잡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곳에서 며칠 묵으면서 하나둘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만 사업수완과 운과 노력이 모두 좋았기에 성공한 게스트하우스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랫만에 한국 음식을 먹고, 뜨끈한 철판 난로 옆에서 샹그릴라 맥주를 마시고... 후타오샤 트레킹의 피로를 푼다.


오늘까지 같이 다니던 동행과 헤어지고 새로운 동행을 만났다. 나이 차이가 10살 정도 나지만 이들이 어렵게 느끼기 보다는 일행으로 생각해주길 바랬다. 회사에서, 사회에서 그렇게 경계해 왔던 꼰대의 모습이 보여지지 않기를, 10살 정도는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어느 정도는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이들과 동행이 되었다. 사회에서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과 어울릴 기회가 점점 없어진다. 직급이 올라가면서 사원, 대리들과는 소통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이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면 좋지 않게 보기도 한다. 거꾸로 젊은 친구들이 불편해하고 꺼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에서는 그런 직급이나 직무를 벗어나 훨씬 편하게 어울릴 수 있다는 것도 여행의 크나큰 장점이다. 사장님, 임원님들. 회사내 소통을 강조하시면서 매년 별 효과없는 커뮤니케이션 교육만 필수적으로 시키실게 아니라 직원들 여행 한번 보내시는건 어떨까요?

다음날 일찍 후타오샤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아직 아무도 깨지 않은 숙소를 조용히 나섰다. 버스는 숙소 주인아주머니께서 전날 어딘가에 연락해서 예약주었는데 딱히 버스표가 있는게 아니라 아주머니가 적어준 쪽지를 들고 버스가 온다는 꾸청 밖 도로에서 기다리면 된다. 버스는 이미 리장 내의 여러 곳에서 여행자들을 태우고 약속시간을 한참 넘어서야 도착했다. 그래서인지 도착한 버스에는 자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버스에 탄 사람들 대부분은 트레킹을 좋아하는 서양여행자들이었는데, 마침 한국인처럼 보이는 젊은 친구의 옆자리가 비어있길래 거기에 앉았다.


버스가 후타오샤로 출발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잘못 걸려 온 전화라 생각하고 무시했는데 연속으로 계속 울리는게 이상해서 받았더니 숙소 아주머니께서 버스에 잘 탔는지 물어보기 위해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버스 타고 잘 가고 있다고 했더니 버스 차장이 타기로 한 내가 안탔다며 연락을 했다고 하셨다. 알고보니 버스에 탈 때 아주머니가 적어 준 쪽지를 보여주고 버스비를 내야 하는데 버스를 타는 중에 차장이 아무 말도 안하길래 내릴 때 요금을 지불하는 줄 알고 버스에 타버렸던 것이다. 사정을 말씀 드리고 버스 차장을 불러 요금을 지불했다. 차장은 좀 궁시렁대는 듯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는지 금방 돌아갔다. 내 입장에서는 내가 버스에 탈 때 차장이 챙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그걸 이 사람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말이 안통하는게 편할 때도 있다.


통화를 마치자 옆에 앉았던 젊은 친구가 '한국인이세요?'하고 말을 걸어왔다. 내가 숙소 아주머니와 통화하는걸 듣었던 것이다. 그리고, 1박2일 후타오샤 트레킹하는 동안 동행할 친구가 생겼다. 내가 차장에게 버스비를 내고 탓더라면, 숙소 아주머니가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트레킹을 하며 혼자 걸었거나 나중에야 동행이 생겼을 것이다. 여행에서 생기는 이런 우연들, 인연들이 여행자를 반갑고 기분 좋게 한다.


버스가 세 시간을 족히 달린 뒤에 위룽쉐산이 보이는 작은 마을에 섰다. 여기서 표 다발을 든 여자가 타더니 후타오샤 트레킹을 하러 온 승객들에게 표를 팔았다. 사실 후타오샤 트레킹을 하도록 코스를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그곳에 수백년 전부터 살던 사람들이 왕래하는 산길일뿐인데 유명해지고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중국정부에서 표를 팔고 있는 것이다. 따지자면 올레길에 온 외국인들에게 표를 파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물을 찾는게 당연하니 어쩔 수 없다. 여튼 중국사람들이 장사는 참 잘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문에 밝은 편이지만 이 사람들은 훨씬 더하다. 표를 사고 나니 버스는 조금 더 들어가서 길가에 사람들을 내려주었다.


표지판도 안내도도 없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을 따라 가면 된다.


사진 앞쪽에 배낭도 없이 걸어가는 사람은 트레커가 아니라 지친 트레커를 태우려는 이곳 현지 마부다.


앞에 어제 나를 애먹였던 위룽쉐산이 보인다. 오늘은 훨씬 기분이 나은지 구름모자를 거의 벗었다.




아주 완만한 오르막을 삼십분쯤 걸었을까? 저 앞에서 가던 서양 트레커들이 갑자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제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본격적으로 오르막이 시작될 참이라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나도 따라 채비를 점검했지만 이들처럼 길가에서 바지를 갈아입지는 못하겠다. 여인네들조차도 스스럼없이 바지를 갈아입는 모습은 여행중에 여러번 봤지만 아직도 낯설다.


꽤 올라왔는지 계곡이 깊어지고 진사장(金沙江, 금사강)이 한참 아래에 보였다.


양쪽으로 5000미터가 훨씬 넘는 위룽쉐산과 하바쉐산을 끼고 걷는 길이기는 하지만 이 곳은 2000미터대로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산에 적응이 안된 몸으로 배낭을 매고 오르자니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을 찾기 전에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는 가장 힘든 구간인 28밴드를 제외하면 초반에는 그리 힘들지 않을거라 했지만 처음부터 꽤나 힘들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작년인가 재작년에 초반 일부 코스가 뀌면서 좀 더 힘들어졌다고 한다. 코스를 시작할때 초등학교를 지난다고 들었는데 그러질 않아서 이상했다.) 힘들지만 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험하지도 않았다. 트레킹을 하는데 부족한 것은 내 체력뿐이었다.


멀리 위룽쉐산의 설봉들이 보인다. 걷는 쪽이 하바쉐산, 건너편이 위룽쉐산이다.


후타오샤(호도협)은 전설에 사냥꾼에게 쫓긴 호랑이가 협곡을 뛰어서 건넜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영문명도 'Tiger Leaping Gorge'이다) 사실여부야 차치하더라도 호랑이가 뛰어서 건널만큼 험하고 폭이 좁은 협곡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 후타오샤로 난 트레일은 원래 차마고도의 일부로 상인들이 다니던 길인데, 외부에 알려진 것은 서양의 학자가 이곳의 생물학적 다양성(전 세계 동물종의 25%가 이곳에 존재한다)을 알리는 논물을 발표하고 나서부터라고 한다. 1980년대에는 세계의 오지를 찾아다니던 여행자들만 방문하는 곳이었으나 1993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했다고 한다. 이곳은 지리학적인 특징은 상류와 하류의 낙폭(170미터), 강의 수위와 협곡을 이루는 봉우리의 높이가 최대 3790미터에 달하는, 이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트레일은 2000미터대에 있다보니 트레커의 시야에서는 그렇게 깊어보이지 않는다.)


트레일 중간에 음료수를 팔던 아저씨. 물 하나 사고 손발짓으로 이야기하다가 갈때쯤 사진 한장 찍어도 되냐니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초반부터 꾸준히 계속되던 오르막이 점점 더 가팔라지고 쉬는 횟수가 늘어났다. 동행이 되었던 젊은 친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먼저 보내고 오히려 느긋해진 마음으로 힘들때마다 자주 쉬어가면서 천천히 올랐다. 같이 버스를 탓던 사람들 중에는 두어명의 서양 여자들 빼고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걷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초반부터 따라오던 현지 마부는 아예 내 뒤에 달라붙어서 말을 타라고 귀찮게 굴었다. 트레킹 코스 옆 간식을 파는 노점에서 쉬려니 자기도 주저앉아서 말을 붙였다. 뒤에 오는 서양 여자들을 가리키며 '쟤네들이나 태워'라고 하니 '서양애들은 안타거든'이라고 한다. '그럼 누가타?'라는 물음에 '한국사람과 중국사람만 타. 서양사람들은 절대로 안타'라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오기가 생겨서 더 타기 싫어졌다.(서로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끼리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는건 몇 번을 경험해도 놀라운 일이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 나시객잔이 있는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도가 높다보니 벼농사는 불가능할테고 주식은 옥수수인 듯...


아름다운 경치지만 매일 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가져오는 커다란 장벽으로만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시객잔 입구에 도착했다.


언뜻보면 우리네 강원도 시골마을과 별반 차이가 없다.


나시객잔은 숙박도 겸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여기서 점심식사를 하고 중도객잔이나 티나객잔에서 묵는다.


나시객잔에 도착하니 고맙게도 먼저 갔던 젊은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를 주문하고 걸으면서는 힘들어서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을 시작했다. H반도체 회사에 다니는 이 친구는 중국법인에 파견되어 1년을 지내면서 중국 여러곳을 돌아보기도 했고, 중국어도 꾸준히 익힌터라 중국어도 능숙했다. 처음 봤을 때는 대학생인가 싶을 정도로 어려보이는 외모였지만 이제 막 서른줄에 들어선 어엿한 30대 직장인이었다. 식사를 하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 친구는 예의바르고 반듯하며 회사일에서도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와 본인을 동일시하지 않아서 좋았다. 간혹 본인의 수준과 본인이 다니는 잘 나가는 회사의 위치를 혼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답답해진다. 이야기하다 보니 이 친구와 꼭 닮은, 예전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후배들이 생각났다.




나시객잔에서 나오자마자 길을 잘못 들었다. 표지도 없고 뭔가 트레일 같지 않은 분위기에 이상하다 싶을 즈음에 앞에서 오던 중국 할머니가 돌아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다시 객잔에 돌아가 길을 물어보고나니 이제야 커다랗게 표시된 표지가 보였다. 어째서 이걸 못봤을지 둘다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나시객잔에서 나와서 좀 걸으면 후타오샤에서 최고 힘든 코스인 28밴드가 나온다. 28밴드인 까닭은 좁고 가파른 바위로 된 길이 28번 굽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참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을 오르고나니 쉼터가 나왔다. 거기서 캔커피를 사서 마시며 주인아주머니에게 28밴드 중에 여기가 몇 번째쯤 되냐고 물었더니 우리를 맨붕시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 밴드는 시작도 안했다는...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고, 심장은 부족한 산소를 보내느라 최대로 펌프질을 하고 있는데 아직 시작도 안했다니 맥이 빠졌다. 우리 앞에는 5,60대(그중 한명은 거의 70대로 보였다)로 보이는 서양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따라 온 예의 그 마부에게 배낭을 맡긴 상태였다. 말의 힘을 빌리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계속 밀어붙일 것인가 아니면 타협을 할 것인가 고민했다. 그리고 50위안을 주고 우리 배낭도 말에 얹기로 했다. 배낭을 매고서 어떻게든 갈 수야 있겠지만 트레킹은 고생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니 체력도 안되면서 무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배낭을 말에 싣고나니 몸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28밴드는 과연 가파르고 힘든 코스였다. 배낭을 매고 왔다면 족히 한 시간 이상 더 걸렸을 것 같았다. 28밴드에 오르면서 말은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가끔은 마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걸음을 멈춰야 할 정도였다. 앞선 사람들의 자그마한 배낭 4개에 우리의 커다란 배낭 2개를 더 얹었으니 고산에서 단련된 튼튼한 말에게도 버거워 보였다. 가장 무거운 배낭을 얹은 우리는 말에게 굉장히 미안해졌다.



28밴드 꼭대기에 도착해서 배낭을 돌려 받았다. 예상대로 마부는 약속했던 50위안이 넘는 금액을 이야기했고, 중국어를 잘 하는 젊은 친구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대응했다. 마부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장기 여행을 할 때도 여러 곳에서 자주 겪었던 일이지만 이들은 그냥 찔러보는 것일 뿐이다. 팁 문화가 있는 서양 사람들은 팁처럼 줄 수도 있다. 혹은 금액을 착각해서 더 많이 줄 수도 있고, 고생한게 있으니 미안해서 부르는대로 줄 수도 있다. 이들은 그런 행운이 있기를 바라며 '시도'해 보는 것일뿐, 그리 나쁜 마음으로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과 약속한 금액을 내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음을 표현하면 금새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지만 당신의 친절함에 감사하기 때문에 조금 더 사례를 하겠다고 하면 나는 그 사람에게 어느새 친구가 되어있다.



28밴드에서 오늘 숙박할 차마객잔까지는 쉬운 산길에다가 위룽쉐산의 봉우리를 오른쪽에 두고 걷기 때문에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중국 아저씨 몇몇이 모여 산기슭에 작은 전망대를 만들어 놓고 자기들이 만들었으니 여기서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곳이 아니더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좋은 포인트는 많기 때문에 돈을 보태 줄 생각이 아니라면 그냥 웃어주고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된다.


가던 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매번 1회용 우비만 사다가 혹시나 싶어서 이번에 처음 사 본 아웃도어용 판초우의를 꺼내서 썼다. 큰 맘을 먹고 산 이 판초우의는 비가 올 때 1회용 우비와는 비할 수 없이 유용했다. 비를 잘 막아주면서도 비닐 우의처럼 덥지 않았다. 그 뒤에 어찌어찌해서 이 판초우의는 내 손을 떠났지만 나중에 다시 트레킹을 할 때가 오면 다시 하나 장만할 것이다.


소나기가 멈추고 후타오샤에 무지개가 떴다. 희미하게 보이지만 쌍무지개였다. 비가 오면 걷기 힘들고 번거롭지만 이런 멋진 행운도 가져다 준다.







28밴드에서부터 차마객잔까지 걸으면서 봤던 경치가 후타오샤 1박2일 트레킹에서 본 최고의 경치였다. 마침 구름도 적당히 걷혀서 거칠고 험한 위룽쉐산의 13봉우리가 멋들어지게 펼쳐졌다. 비록 어제 위룽쉐산에서 눈과 구름밖에 보지 못하고 내려왔지만 후타오샤에서는 평균보다 나은 날씨에 트레킹을 할 수 있었다.





차마객잔에 짐을 풀고 식당 옥상에 올라가니 먼저 온 사람들이 햇볕을 쬐며 앉아 있었다. 옥상에서 본 경치도 무척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차마객잔까지 오면서 봤던 경치가 더 좋았다.


차마객잔에는 한국 트레커를 위한 메뉴로 백숙이 있다. 오래전 이곳에 온 트레커가 닭을 사서 백숙을 해달라고 주문하면서 요리법을 알려주었다는데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많아지면서 아예 가장 비싼 정식 메뉴로 자리잡았다. 고생했으니 몸보신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백숙을 시켜놓고 따리 맥주를 마셨다. 시간이 걸려 나온 백숙은 거대했다. 양계장의 경제성 때문에 큰 닭을 보기 어려운 우리나라와 다르게 이곳은 아직도 닭을 풀어서 기르기 때문에 닭이 무척 컸다. 그리고,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맛도 무척 훌륭했다. 처음에는 둘이서 이 큰 백숙을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정신을 차리고보니 밥까지 시켜서 먹고 있었다. (세상에 김치까지 제공된다.)


산이 높으니 밤이 금새 찾아왔다. 외부에 있는 세면장에서 급히 샤워를 하고(태양열로 물을 데우기 때문에 빨리 하지 않으면 더운 물이 떨어질 수도 있다) 나오니 식당에는 커다란 배낭을 매고 이제야 도착한 한국인 남자 둘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식사를 하던 중이었고 나는 얼른 잠자리에 들고 싶어서 굳이 가서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인연이 있으면 내일 볼 수 있겠지 생각하고 지나쳤다. 이 사람들이 그 후 며칠동안 나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고는 이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후타오샤 트레일이 세계 3대 트레일이라고 할만 하냐고 물으면 '글쎄...'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했던 트레킹 중에서 최고냐고 묻는다면 '아니오'라고 할 것 같다. 똑같이 트레킹을 좋아하더라도 사람마다 좋아하는 풍경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은 후타오샤 트레킹을 최고로 칠 수도 있다. 분명 훌륭하고 멋진 트레일이지만 나에게는 최고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같이 트레킹했던 젊은 친구는 중국의 유명한 풍경구인 황산, 화산 등등을 가봤다고 했지만, 후타오샤만큼 자연의 경이를 느낄 수 있는 장엄하고 거대한 풍경은 아니었다면서 이 곳이 더 낫다고 했다.)

어젯밤 잠들기전에 날씨를 확인하러 숙소 마당에 나오니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좋았던 날씨가 하루 사이에 이렇게나 바뀌다니 머리로는 '역시 고산지대라 그런가보다'하고 이해하려 했지만 마음으로는 '왜 하필 그 날이 오늘이냔 말인가'하는 불평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입장권을 끊어놓은 것도 아니라서 날씨가 너무 좋지않으면 옥룡설산을 포기하려 했다. 리장에 있는 마지막 날이니 미룰 수도 없었다. 여행이란게 원래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부랴부랴 날씨를 확인하니 다행히 비는 그쳐 있었고 하늘도 생각보다 흐리지 않았다. 밤사이에 날씨가 또 바뀌었으니 설산을 오르는 중에 맑아질 수도 있을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어제 사둔 간식거리와 물을 챙겨서 숙소를 나섰다.

 

'나쁘지 않아, 괜찮아질거야' 그랬는데...


위룽쉐산(옥룡설산)으로 가려면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하루에도 엄청난 관광객이 몰리는 국가 최고등급의 관광지에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여튼 거기에 가기 위해서는 여행사를 통해 관광버스를 타거나, 소위 빵차라고 부르는 빠오처(包車, 전세차)나 미엔빠오처(面包車, 승합차) 이용해야 한다. 리장시내에서 위룽쉐산 사이를 다니는 7번 미엔빠오처는 모택동 동상이 있는 인민광장 건너편에서 탈 수 있다.


아침 일찍 7번 미엔빠오처를 탈 수 있다는 곳으로 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과 차들로 붐비고 있었다. 하지만 오는 순서대로 차에 태워서 만차가 되면 출발하는 구조라서 타라는 차에 그냥 타고 있으면 된다.


운이 좋았는지 새 차에다 승객중에 덩치가 큰 편이라서 앞자리를 배정 받았다.


차가 출발하고 금방 도착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먼저, 위룽쉐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방한복과 산소통을 파는 가게에 들른다. 위룽쉐산 명승구 내에서도 빌릴 수 있는데 외부가 싸기 때문인지 위룽쉐산으로 가는 길에는 그런 가게들이 무척 많았다. 게다가 같이 탄 승객들은 들른 가게의 가격이 비싸다 싶으면 다른 가게로 가자고 기사에게 요구해서 두세번을 들러야했다. (우리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다.) 


몇 군데의 가게를 들르고나서 승합차는 다시 어딘가 건물이 있는 곳에 멈췄다.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 몰라서 차안에서 멀뚱멍뚱 기다리고 있었더니 위룽쉐산 케이블카 표를 파는 곳이라고 빨리 내려서 표를 사라고 했다. 위룽쉐산은 아직 보이지도 않는데 표를 파는 곳이라니 뭔소린가 싶었는데 매번 이해할 수 없는, 입장하는 곳과 매표소가 한참 떨어진 그 구조가 여기도 반복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지만 사람들은 줄을 엄청 길게 서 있었고, 줄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맨 뒤에 서서 왜 줄이 안줄어드는지 지켜보니 사람들이 자꾸 앞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돈과 신분증을 보여주고 표를 사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심지어 단체 관광객 가이드로 보이는 사람은 수십명 분의 신분증과 돈뭉치를 건네기도 했다. 아직도 새치기를 떳떳하게 한다더니 아무말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이 바보인거다. 다들 그렇게 새치기하니 따지는 사람도 화를 내는 사람도 없었다. 어떻게하나 난감해하고 있던 차에 승합차를 같이 탄 젊은 중국커플이 나를 끌고 자기들이 먼저 와서 서 있던 자리에 밀어넣었다. 이런 떳떳한 새치기에 적응을 못한 내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괜찮다는 표정으로 답을 했다. 서로 대화가 전혀 안되는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 묘한 동지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200위안에 가까운 돈을 주고 케이블카 탑승권을 샀다. 그런데 여기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탑승권마다 30분 단위로 시간이 찍혀 있어서 그 시간이 아니면 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칫 그 시간을 놓치기라도 하면 다시 사야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케이블카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기다리는 걸 예방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보니 어차피 기다려야 하는건 마찬가지라 별 의미가 없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케이블카를 탔지만 탑승시간이 정해져 있는 케이블카는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7,80년대 버스터미널이 이랬을까?



어쨌든 표를 사고 승합차에 다시 올랐다. 조금 더 가서 도시 외곽으로 나가니 소들이 차도로 다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매표소에서 도와준 중국커플은 방한복과 산소통까지 사서 중무장하고 있었는데 얇은 패딩과 바람막이만 입고 산소통도 사지 않은 내가 걱정되었는지 손으로 그것들을 가리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행을 하면서 안데스의 5000미터 넘는 곳에서도 고산병이 없었으니 위룽쉐산에서도 그럴 것 같긴 했지만 자꾸 걱정해주니 스스로도 조금 불안해졌다. 재밌는 것은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한국인과 한국어는 커녕 영어 한마디도 안되는 중국인이 마음을 나누는데는 표정과 손짓이면 충분했다는 것이다. 여행에서의 이런 경험은 나중에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위룽쉐산 풍경구에 들어오기 직전에 검문소에서 다시 100위안을 내라고 했다. 왜 내야하는지도 모르고 일단 내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돌아갈 수도 없고 중국 공무원들한테는 따져봐야 통하지 않는다는걸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순순히 100위안을 내야했다. 중국 관광지는 외국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삥을 뜯는 것 같다.


승합차 기사와 걱정해준 중국 커플. 블로그를 볼 일이 없을테니 얼굴 공개


위룽쉐산 풍경구 입구.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는게 아니라 기다렸다가 케이블카 탑승 시간이 되면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중국인 커플은 내가 불안했는지 케이블카 타는 곳을 왕복하는 셔틀 승차장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 눈치로 뻔히 저기서 타면 되는걸 알면서도 나보다 한참 어린 이 친구들의 친절이 고마워서 오히려 돌아가고, 시간이 더 걸렸어도 기꺼이 따라다녔다. 이들의 친절을 받는 것도 이제 끝이났다. 바로 이어서 표를 샀음에도 친절한 중국인 커플과는 케이블카 탑승시간이 달라서 여기서 헤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날까지 중국여행을 하면서 중국에 대한 호불호는 부분에 따라 크게 갈렸다. 개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회시스템, 전체적인 서비스 의식부족, 과도한 상업화는 중국에 와서 실망한 부분이지만 중국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여행 전보다 좋아졌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휴가라서 불편했을거라며 100위안하는 콜택시를 대신해 자기 차로 데려다준 홍콩영화 조폭처럼 생긴 숙소 사장님, 두세번 가면 알아보고 아는체하는 직원, 주문할때 나도 모르게 나온 한국말을 따라하며 쑥스럽게 웃는 식당 아주머니, 그리고 이날 자기들 자리에 나를 세워주고 길 안내를 해준 젊은 친구들까지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 까닭이다. 이런 경험은 나중에 다시 중국을 찾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된다. 치안이 불안한 남미를 다시 찾는 이유, 덥고 비위생적인 동남아를 다시 찾는 이유는 거기에 사는 사람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사람의 매력에 빠져야 그 나라에 다시 가보고 싶고, 더 깊이 알고 싶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관광정책을 돌아보면 한심할 정도다. 방문하는 관광객의 숫자에 목을 매면서 불친절, 바가지요금, 특색없는 관광상품은 개선할 생각을 하지않고 겨우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같은 행사로 외국인 관광객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본다면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 숫자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화장품 같은 몇몇 품목을 제외하고 쇼핑에 있어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경쟁력이 전혀 없음에도 거기에만 집착한다. 이들을 다시 찾아오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에 있다.


탑승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위룽쉐산은 완전히 구름에 잠겨 있었다.


구매한 케이블카 탑승권에 찍힌 시간은 10시 30분이었다. 20분쯤 되자 출입구를 통제하고 있는 직원이 표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대기하던 건물 뒤편으로 나가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셔틀버스였다. 이 셔틀을 타고 산중턱을 올라가야 케이블카 탑승장에 도착한다. 중국의 관광지 시스템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대여하는 방한복들은 대부분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 색이다.


알프스에서는 케이블카가 구간별로 나뉘어져 있어 가장 높은 곳까지 가려면 여러 번을 갈아타야했는데 위룽쉐산의 케이블카는 한번에 올라갔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기 시작한지 얼마되지않아 잔뜩 낀 구름과 내리는 비로 바깥 풍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날씨가 나빴다.


드디어 케이블카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해발 4500미터에 도착했다. 빠른 속도로 오르다보니 압력차 때문에 귀가 조금 막히고 머리는 멍했다. 이럴 때는 급하게 움직이지 말고 몸이 적응할 수 있게 가능한 천천히 움직여줘야 한다. 각자 기압차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르다보니 케이블카에 내리자마자 구토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케이블카를 내린 곳(4500미터)에서 사람들이 갈 수 있도록 허가된 가장 높은 전망대(4680미터)까지는 걸어서 가야한다.

안그래도 고산지대라 숨이 빨리 가빠오는데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서 힘들었다.


산 정상부근은 눈이 내리고 있었고, 가까운 산들도 희미하게 보일락말락 했다.




나시족의 성산인 위룽쉐산은 1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높은 봉우리는 5600미터에 달한다. 이 위룽쉐산과 가까이 닿아있는 산이 하바쉐산(합파설산, 약 5400미터)인데, 이 두 산 사이의 계곡이 세계 3대 트레킹코스라는 후타오샤(호도협)이다. 그리고, 호도협을 흐르는 강이 양쯔강의 상류인 진사장(금사강)이다. 하지만 눈과 구름에 가려져서 아름답다는 설산은 나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지점부터 전망대까지는 불과 180미터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렇게 만만히 볼 수는 없다. 몸이 고산지대에 적응이 안된 상태이기 때문에 조금만 올라도 매우 숨이 가빠진다. 다리는 아프지 않고 몸도 전혀 힘들지 않은데 심장은 쿵쾅거리며 펌프질을 하고 입은 절로 벌어져서 부지런히 공기를 들이마신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고산병일 걱정은 없으니 다행이다. 천천히 가면서 숨이 가쁘면 쉬었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하면 된다. 고산증세가 심 사람은 우선 머리가 매우 아프기 때문에 무리해서 오르려 하지말고 일행이 다녀오기를 기다리거나 증세가 심하다면 바로 내려가는 것이 좋다.





이제 슬슬 끝이 보인다. 날씨가 맑았다면 멀리 있는 봉우리가 훌륭한 장관을 보여주었을텐데...



하늘이 조금 맑아지는 듯해서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이때가 그 날 위룽쉐산에서 가장 좋은 날씨였다.



위룽쉐산의 만년설과 빙하


4680미터 전망대에 도착했다. 안데스에서 5000미터 넘는 곳도 갔었고, 4000미터대에서 트레킹도 했었지만 그때는 고산지대에 적응이 되었을 때라 배낭을 매고도 잘 다녔었는데 여기서는 겨우 180미터를 오르는데도 무척 힘들었다. 게다가 눈이 오니 계단이 무척 미끄러워서 넘어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렇게 힘들게 왔지만 하늘은 여전히 맑아지지 않았다.




불과 180미터 아래에 있는 출발지점이 눈과 구름으로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다.



예전에 지하철역사에 종종 있었던 델리만주 매장이 위룽쉐산에 있었다. 중국브랜드였나?



날씨는 춥고 배도 고파서 따뜻한 커피를 시켜서 가져간 빵과 같이 먹었다. 아메리카노를 줄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내준 것은 커피믹스였다.



다시 내려왔더니 케이블카를 타려는 줄이 엄청나게 길어져 있었다. 이럴거면 케이블카 탑승시간은 뭐하러 정해놓은거지?


위룽쉐산은 산이 크고 높다보니 모우평, 운삼평, 백수하 등등의 볼거리가 있는데 이곳에 가려면 케이블카 탑승장에서 버스를 타야했다. 버스를 타고 작은 구채구라 불리는 백수하로 갔다. 거기서 다른 곳으로 가는 케이블카로 갈아타야한다.

오오~ 물빛이 장난이 아니네! 옥빛 물빛이 한껏 기대하게 만들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 중국 관광지는 다시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백수하 근처에서 하차장을 만들면 될 것을 굳이 윗쪽에 만들더니 다시 50위안이나 내고 백수하만 운행하는 전기셔틀을 타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걸어가려고 했지만 인도는 없는데다가 워낙 도로폭이 좁고 셔틀이 꽤나 빠르게 지나다녀 위험했다. 화가 나서 속이 쓰릴 지경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백수하의 물빛이 예뻐서 기분이 좀 풀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멀리 보이는 폭포가 좀 이상하다. 마치 장난감인듯...


어라, 터키 파묵칼레처럼 보이는 이곳도 뭔가 인공미가 느껴지네



잠깐이나마 백수하의 물빛을 보고 반한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 백수하는 위룽쉐산의 물길을 막아 만들어 놓은 인공의 유원지일뿐이었다. 그러고보니 이 물조차도 위룽쉐산에서 내려오는 물인지 의심스러워졌다. 고작 물길을 막아 만들놓은 이런 풍경을 보려고 돈을 내고 여기까지 온게 후회스러웠다.



물안에서 죽은 고목도 인공적으로 물을 가두고 물길을 넓히면서 죽게 된 것으로 보인다.


만들어진 경치라는 것을 알고나자 전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제법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웨딩촬영을 하고 있다.


만들어놓고 별이 다섯개라고? 흥,칫,뿡이다.


실망을 거듭하던 와중에 결정적인 것을 보고 말았다.


사람이 일부러 만든 경치였다는 확실한 근거를... 그런데 여행책자에도 인터넷 블로그에도 그렇다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모우평이나 운삼평에 가려면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야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다. 돈을 들여 갔는데 또 인공미 좔좔 흐르는 그런 경치를 보여주지나 않을지도 걱정이었다. 백수하에서 충분히 실망하고나니 다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여기까지 오는데 쓴 돈만 500위안에 가까웠다. 위룽쉐산은 산 전체가 거대하고 값비싼 유원지일뿐이었다. 다시 7번 승합차를 타고 리장시내로 돌아왔다. 



시내 날씨는 이렇게 좋은데 산에는 눈과 비바람이 뿌려대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위룽쉐산으로 가는 승합차를 탈 수 있는 인민광장


위룽쉐산에서 돌아와 실망스러운 기분을 달래기 위해 맥주를 한잔 하기로 하고 인테리어가 마음에 드는 조용한 까페에 들어갔다. 메뉴를 보니 라오스에서 줄창 마셨던 비어라오가 있었다. 달콤하고 쌉쌀한 맥주가 들어가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천천히 조금씩 시간을 들여 맥주를 마시다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오늘도 리장꾸청내 스팡지에에는 사람과 음악소리가 넘쳐난다.


리장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지나갔다. 리장은 내가 상상하던 리장이 아니었고, 위룽쉐산도 기대했던 위룽쉐산은 아니었다. 리장은 그냥 관광객으로부터 돈을 벌기 위한 거대한 상업지구일뿐이다. 그나마 만났던 친절한 사람들이 오늘의 유일한 성과였다. 내일은 이번 여행의 또다른 목적지인 후타오샤로 떠난다. 제발 후타오샤에서는 이런 실망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랬다.


수허구전에서 헤이룽탄 공원까지 바로 가는 시내버스가 없었다. 가능한 가까운 곳에서 내려서 걸어야했다. 여행지에서 낯선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제법 먼 거리였지만 발걸음이 가벼웠다.



걷다가 북쪽으로 난 길을 보니 멀리 위룽쉐산이 보였다. 오후가 되면서 점점 구름이 많아지더니 설산 꼭대기가 짙은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내일 위룽쉐산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점점 걱정되기 시작했다.


시장 규모에 비해 입구가 너무 큼직하다.



'남한에 종이는 좋다'(?) 맞춤법은 맞지 않지만 중국에서 한국산 제품들은 고급으로 인식되는지 쿤밍에서 리장까지 한국어로 쓰여진 간판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성형외과병원 선전물이라 오히려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헤이룽탄 꽁위안(黑龍潭公園, 흑룡담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은 흑룡담이라는 연못 주변과 연못 내에 만들어진 작은 섬, 동파문자 연구소와 나시족 박물관을 포함하고 있었다. 연못 옆으로 나지막한 산을 끼고 있는데 산 위에 보이는 정자에 오르면 주위 경치가 무척 잘 보일 것 같았지만 아침에 국수를 먹은 뒤로 더 이상 먹은게 없다보니 오를만한 체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공원 북쪽에서는 울창한 버드나무에 가려 위룽쉐산이 흑룡담에 비치지 않았다.


위룽쉐산의 만년설이 녹은 물이라는데 흑룡담의 물은 전혀 깨끗하지 않았다. 옛날 흑룡담이라 이름이 붙여지던 시절에는 맑았을 물이 도시가 커지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더러워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맑은 물에 비치는 위룽쉐산을 기대하고 왔으니 아쉬움이 가시진 않았다. 일단, 둥바(東巴, 동파)문자와 나시(納西, 납서)족에 대한 자료가 전시된 박물관을 찾았다.




동파문자는 사용된지 1000년이 넘는,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상형문자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동파문자를 보면 이것이 그림인지 문자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예전에 동파문자 하나하나에 대해 왜 이런 글자가 되었는지 설명을 해주던 다큐멘터리를 보고 문자 하나가 담고 있는 큰 의미에 감탄했던 기억이 났다. 


아침 수허구전에서 봤던 나시족 용사와 똑같은 포즈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 서양인이 큐레이터로부터 나시족 민속의상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나야 그저 구경하며 지나칠 뿐...



작은 도시의 시립박물관이지만 유물은 잘 전시·보존되고 있었다.

지자체장들의 공약남발로 세금을 들여서 지어놓고 제대로 관리는 하지 않는 우리의 많은 중소박물관들이 본받아야겠다.


사면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이 전시실이다.


박물관 입구


흑룡담 공원 북쪽에 놓여진 나무다리는 무척이나 낡아있었지만 나름 정취가 있다.



벤치에서 카드놀이에 열중인 아주머니들. 중국하면 마작을 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대부분 카드놀이를 한다.

길거리에서도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마작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날씨가 좋았더라면, 바람이 불지 않았더라면 위룽쉐산이 흑룡담에 비쳤겠지만 딱히 기대되지는 않았다.

여행을 많이 다니고, 본 것이 많아질수록 높아지는 눈높이와 약간 건방진 마음도 생긴다.


여기서 본 풍경이 이 날 흑룡담 공원에서 본 가장 훌륭한 풍경이었다.


흑룡담 공원 남쪽문을 나와 물길을 따라 아래로 걸어내려왔다. 지나가는 길에 돼지머리를 통째로 굽고 있는 광경도 보이고, 이제는 중국 어느 관광지에 가도 넘쳐나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수없이 만났다.





오기 전에 기대했던 리장은 아니지만 몇 년간 그려왔던 리장의 모습은 모두 담고 가리라 생각하고 이제는 지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꾸청내의 언덕배기로 옮겼다. 꾸청을 가까이에서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은 꾸청내의 성벽인지 누각인지(이름은 잊었다.)였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입장료가 또 수십위안이었다. 그런데 돈을 보태고 싶지 않아서 꾸청의 좁은 골목길을 여러 번 돌아 높은 곳에 오르니 그나마 꾸청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 나왔다.




새벽부터 시작된 도보여해으로 이제 몸이 녹초가 되어버렸다. 어째 산길을 하루종일 걷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꾸청을 전망할 수 있는 커피숍을 발견하고 커피를 시켜 2층으로 올라갔다. 꽤 비싼 커피였는데 창가는 이미 자리가 차 있었다. 늦었으니 그건 어쩔 수 없다치고 창가 자리를 잡고는 쇼파에 드러누워 있는 젊은 여자 두 명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나 누워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국사람인 것 같은데 잠시 뒤엔 아예 코까지 살짝 골면서 잠을 잤다. 여행중에 피곤하면 까페에서 잠깐 잠이 들 수도 있지만 신발까지 벗고 쇼파에 올라가 잠들어버리는 건 꼴불견에 속하는 행동이다. 우리를 방문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수준을 이야기하기에는 우리의 여행문화도 그다지 성숙해 있지는 않다.



오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가는 길은 다니지 않던 방향으로 잡았다. 가다보니 황제의 명으로 리장을 다스렸던 목씨의 집(목부)이 있어 들어가봤다. 그런데 입장료가 또 100위안에 가까운 돈이었다. (아마도 80위안이었던 것으로...) 목부의 대문만 사진으로 남기고 혀를 차며 다시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위룽쉐산의 꼭대기에는 구름이 제법 많았지만 어느 정도 봉우리 모양을 보여주고 있었다. 숙소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잠들기 전에 하늘을 보니 별도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내일 날씨가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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