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중세시대에 기독교인들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성지순례를 했다고 한다. 그 뒤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성지순례가 불가능해지자 교황은 스페인 북서부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성지순례하는 것으로 대신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스페인 북부까지도 이슬람 세력의 침입이 심해졌고, 성지순례하는 기독교인들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레콩키스타 운동과 성지순례하는 기독교인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기사들의 참전까지 더해져 결국 15세기 말 이베리 반도는 다시 기독교인들의 손에 넘어왔다.
중세시대에 시작된 성지순례는 현대에 들어서는 종교인들의 성지순례 목적보다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고행의 길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유명한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자전적 소설 '순례자'를 통해 유명해졌으며 그 뒤로 여행작가, 방송인들의 체험책자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불과 10년전만해도 얼마되지 않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방문자 숫자가 최근 몇 년동안은 몇몇 유럽의 주변국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수라고 하니 유럽중에서도 가장 먼 이 곳까지 오는 이유가 단순히 유행인 것인지 혹은 뒤돌아볼 것없이 바쁘게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대인들의 내적 갈증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중세시대에는 각자 자신의 집에서부터 걷거나 말을 타고 산티아고까지 가는 것이었지만 요즘은 몇 개의 유명한 루트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하는 루트가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프랑스까지 가는 것도 번거롭고 어차피 2주간의 체험이 목적이기 때문에 여행을 겸하여 팜플로나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사실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상관 없다. 이 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사람들은 기왕이면 길을 걸었다는 인증을 받기 위해 산티아고 근처 도시부터 걷지 그랬냐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번에는 이 길을 짧게 체험하고 앞으로 다시 올 것인가 결정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인증을 받는 것은 상관 없었다. 참고로 인증서는 100km이상을 걸어서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부여해준다.
바르셀로나를 출발한 기차가 멈춘 팜플로나의 기차역은 구시가에서 벗어난 외곽에 있었다. 구시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꽤 걸어야 하는 거리지만 어차피 걷기 위해서 여기에 왔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우스운 것 같아서 천천히 걸어 구시가로 들어갔다.
스페인의 다리들은 대부분 사진처럼 가운데가 높게 만들어져있다.
산 페르민 축제를 할 때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는 팜플로나 시청사
팜플로나는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였으며 그의 소설 '그래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이 도시의 '산 페르민' 축제를 묘사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축제는 이름은 몰라도 다들 한번쯤 본 적이 있는 그 유명한 소몰이 축제다. 중세 도시의 좁은 골목에 소들을 풀어 놓고 흥분한 소들의 앞을 뛰어 다니는 축제가 바로 그 '산 페르민'이다. 이 축제를 할 때는 작고 조용한 이 도시에 주민수의 몇 배나 되는 관광객들이 몰린다고 한다.
시청사를 지나 순례자들이 묵는 숙소(알베르게)를 찾아 걷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고 수십대의 페라리들이 길을 지나고 있었다. 스페인의 페라리 동호회인지, 페라리에서 주최하는 행사인지 모르겠지만 경찰까지 나와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옛날 페라리부터 최신형 모델까지 한번에 이렇게나 많은 페라리를 본 것도 난생 처음이었다.
순례자들은 순례자용 숙소(알베르게)를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데 순례자임을 확인하는 증명서가 순례자용 패스포트이다. 이것은 도시의 큰 알베르게에서 발급 받을 수 있다. 이 패스포트에 지나는 마을이나 알베르게에 있는 스탬프를 찍어서 내가 이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하는데 각 지역의 스탬프의 모양이 모두 다르고, 그 모양이 그곳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들이라 패스포트에 늘어가는 스탬프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팜플로나의 알베르게에서 패스포트를 사고 하룻밤을 여기서 묵었다. 이곳의 알베르게는 고풍스런 건물에 크기가 무척 커서 수십개에 달하는 2층 침대가 커다란 공간에 꽉 들어차있었다. 그래도 시설은 깨끗하고 낡지 않아서 좋았지만 하루종일 걷느라 지친 순례자들의 코고는 소리가 심하기 때문에 소리에 예민한 사람들은 그들이 잠들기 전에 얼른 자는게 좋다.
고풍스러운 건물의 알베르게. 시설도 나쁘지 않았다.
새벽 6시 전에 일어나 짐을 꾸리고 6시쯤 알베르게를 나왔다.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하늘과 아무도 없는 골목이 조금 쓸쓸하게 보이지만 이 때는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이며, 이번 여행의 목적중 하나였던 순례자의 길을 드디어 걷는구나 싶어서 조금 흥분 상태였다.
각 도시마다, 지역마다 순례자에게 길의 방향을 알려주는 표식이 다르다. 팜플로나는 비교적 큰 도시라 위의 사진처럼 깔끔하게, 그리고 촘촘하게 표식이 설치되어 있다. 시골로 들어서면 페인트로 칠한 화살표시, 나무표지판, 리본 등등으로 되어 있고 표식간의 간격도 띄엄띄엄 떨어져있어서 간혹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7월말의 스페인 북부지방은 밀 추수가 다 끝나있었다. 밀알은 없지만 밀대는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곳곳이 모두 황금색 들판이었다. 대신 이때의 스페인 들판은 해바라기가 한창 필 시기였다. 길을 따라 몇 송이 핀 해바라기가 아니라 넓은 들판에 끝도 없이 해바라기꽃이 펴 있는 광경은 처음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이쪽 지방은 산이 대부분 구릉형대이며 높고 험하지 않아서 산꼭대기까지 모두 밀이나 해바라기를 키우고 있었다.
엄청난 수의 해바라기를 만났다. 처음엔 그냥 우와하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도보 순례자이긴 하지만 자전거로 다니는 사람도 꽤 많고, 간혹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순례자 기념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보 여행길이지만 가끔 무리한 일정이나 건강상의 이유로 길 위에서 사망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가 사망한 자리에 세워진 조그만 기념비에 순례자들은 조그만 돌을 올려놓거나 꽃을 헌화하며 일면식도 없지만 마음속으로 그를 애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팜플로나를 떠나 두세시간쯤 걸었을까, 언덕위에 조그만 마을이 나왔다. 전날 미리 아침식사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마을에서 간단히 요기를 해야한다. 조그만 가게에서 빵과 과일을 사서 성당 돌위에 퍼질러 앉았다.
길을 걸으며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물과 음식이 떨어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자주 조그만 마을이 나오지만 간혹 한동안 마을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한낮엔 35도를 가뿐하게 넘어가는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무사히 걸으려면 배낭에 여분의 물과 음식은 필수사항이다.
스페인의 태양은 정말 뜨겁다. 하루종일 길을 걸으며 몇 리터의 물을 마시더라도 소변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땀도 바로바로 증발되기 때문에 옷이 땀에 절긴하지만 완전히 젖어 축축해지지 않는다. 햇볕에 화상을 입지 않으려면 썬크림도 필수다. 귀찮으니 한시간쯤 어떠냐고 무시했다간 나처럼 숙소에서 한쪽 벌겋게 익어버릴 어깨를 보게될 것이다.
길을 걷는 동안 풍력발전을 하는 프로펠러를 정말 자주 볼 수 있었다. 바람이 조금 센 언덕에는 어김없이 프로펠러가 있었는데 능선을 따라 수십개의 프로펠러가 늘어서 있기도 했다. 참고로, 스페인은 대체 에너지 사용률이 꽤 높은 국가라고 한다.
바람이 세기로 유명한 언덕에 올랐다. 언덕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그 언덕에서 맞은 바람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사진으로는 맑은 하늘이라 바람이 세게 불 것 같지 않지만 어찌나 바람이 센지 언덕에서 쉬는 사람들은 모두 바람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이 언덕 꼭대기에는 아래 사진처럼 그 옛날 순례자들이 바람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조형물이 있다.
한동안 걷다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태양도 점점 뜨거워졌다. 첫날 팜플로나로부터 23킬로미터 떨어진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걸을 계획이었다. 6시부터 걸었으니 쉬거나 식사하는 시간을 빼고 4,5시간쯤 걸으면 점심때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더위로 쉬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도착시간도 조금 늦어졌다.
인상적이었던 성당 앞의 십자가상
점심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을 외곽에 있는 알베르게를 찾아서 식사를 하고, 빨래를 해서 널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배낭 무게를 줄이느라 최소한의 옷가지만 챙겨서 다니기 때문에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다들 그날 입은 빨래를 해서 널기 바쁘다. 자칫 게으름을 부리면 이튿날 소금기로 하얗게 얼룩진 옷을 다시 입고 걸어야한다.
첫날이라 그런지 23킬로미터를 넘게 걸었어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준비없이 오게되면 훨씬 힘들었겠지만 수개월을 무거운 배낭과 동거동락했더니 기본 체력이 훨씬 좋아진 것 같았다. 게다가 첫날엔 체력이 남으니 걸으며 찍은 사진도 꽤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30일이 넘게 걸어야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다. 날이 갈수록 체력이 떨어질게 분명했다. 알베르게에서 저녁까지 사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날 알베르게에서 한국에서 온 대학생을 만났다. 방학이면 다들 유럽여행을 하는데 그러지않고 이곳으로 온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유럽여행은 나중에도 할 수 있겠지만 여기는 그러기 힘들지 않겠냐며 자신이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경비를 모아서 왔다고 했다. 꽤 기특한 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