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에도 6시쯤 걷기 시작했다. 7월말 스페인은 무척이나 덥고 태양이 강하기 때문에 6시 출발, 12시나 늦어도 1시 전에 도착하는 것으로 나름의 규칙을 정했다.




걷다보면 주위가 천천히 밝아온다. 그리고 한두시간쯤 지나면 벌써 햇볕을 받은 등과 목덜미에 뜨끈한 열기가 전해진다. 길은 다양하다. 도시의 평평하고 잘 정돈된 길도 있고, 농로나 자갈길, 산길도 있고,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를 따라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이 비포장된 길이기 때문에 신발이 무척 중요하다. 당연히 밑창이 두꺼운 등산화나 트래킹화가 좋다. 가끔 이런 신발들은 배낭에 매단채, 슬리퍼를 신고 걷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물집이나 다른 더 고통스러운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다니는 것이다.


내 신발도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6개월째 여행하는 동안 많이 닳아서 밑창이 얇아지고 맨들맨들해진 것이다. 이틀짼데 벌써 발바닥을 콕콕 찌르는 자갈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걷다보면 곳곳에서 포도나무가 보였다. 순례자의 길에 대한 여행기나 수필을 읽어보면 포도를 따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여름은 포도가 한참 익어가는 시기라 먹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연히 극심한 갈증 때문이 아니라면 함부로 먹어서도 안될테고.


페인에도 와인이 무척 많이 생산된다. 와인이 무척 싸기 때문에 자주 와인을 마실 수 있다. 각 마을이나 도시의 레스토랑마다 '메뉴 델 디아'라는 메뉴가 있다. 우리말로는 '오늘의 메뉴'인데 큰 도시의 관광지에서는 15유로, 관광지가 아닌 작은 마을에서는 6~10유로 정도면 먹을 수 있다. 언뜻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에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음료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음료로 와인을 선택하면 레스토랑의 하우스 와인을 유리병에 담아 내어주거나 병째로 주는 경우도 있다.


와인과 함께 에피타이저(스파게티나 샐러드), 메인(돼지, 소, 닭고기 요리), 디저트(아이스크림)을 먹는데 그 정도 가격이라면 저렴해도 엄청 저렴하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은 과거 작은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고 한 나라로 통일된지 얼마되지 않은데다가 언어도 조금씩 다르다. 역사적으로도 분리독립 요구를 융화보다는 독재와 억압으로 눌러왔기 때문에 아직도 독립을 요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팜플로냐에서 시작한 순례길은 바스크 지역을 지나는 동안 도로나 길 곳곳에 독립을 요구하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정치적으로 탄압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과거가 불과 몇 십년 지나지 않았기에 이들의 독립 요구가 비이성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이들에게 사과하고 감싸안지 못하는 스페인 정부의 무능함이 한심해지지만 생각해보니 우리 또한 별반 다를게 없다.





한낮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이제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를 찾아 쉬어야 할 시간인 것이다. 빨리 쉬어야 내일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오늘은 Estella까지 24km 정도를 걸었다.



지금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중세시대에 기독교인들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성지순례를 했다고 한다. 그 뒤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성지순례가 불가능해지자 교황은 스페인 북서부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성지순례하는 것으로 대신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스페인 북부까지도 이슬람 세력의 침입이 심해졌고, 성지순례하는 기독교인들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레콩키스타 운동과 성지순례하는 기독교인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기사들의 참전까지 더해져 결국 15세기 말 이베리 반도는 다시 기독교인들의 손에 넘어왔다.


중세시대에 시작된 성지순례는 현대에 들어서는 종교인들의 성지순례 목적보다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고행의 길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유명한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자전적 소설 '순례자'를 통해 유명해졌으며 그 뒤로 여행작가, 방송인들의 체험책자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불과 10년전만해도 얼마되지 않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방문자 숫자가 최근 몇 년동안은 몇몇 유럽의 주변국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수라고 하니 유럽중에서도 가장 먼 이 곳까지 오는 이유가 단순히 유행인 것인지 혹은 뒤돌아볼 것없이 바쁘게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대인들의 내적 갈증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중세시대에는 각자 자신의 집에서부터 걷거나 말을 타고 산티아고까지 가는 것이었지만 요즘은 몇 개의 유명한 루트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하는 루트가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프랑스까지 가는 것도 번거롭고 어차피 2주간의 체험이 목적이기 때문에 여행을 겸하여 팜플로나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사실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상관 없다. 이 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사람들은 기왕이면 길을 걸었다는 인증을 받기 위해 산티아고 근처 도시부터 걷지 그랬냐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번에는 이 길을 짧게 체험하고 앞으로 다시 올 것인가 결정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인증을 받는 것은 상관 없었다. 참고로 인증서는 100km이상을 걸어서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부여해준다.


바르셀로나를 출발한 기차가 멈춘 팜플로나의 기차역은 구시가에서 벗어난 외곽에 있었다. 구시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꽤 걸어야 하는 거리지만 어차피 걷기 위해서 여기에 왔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우스운 것 같아서 천천히 걸어 구시가로 들어갔다. 

스페인의 다리들은 대부분 사진처럼 가운데가 높게 만들어져있다.


산 페르민 축제를 할 때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는 팜플로나 시청사


팜플로나는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였으며 그의 소설 '그래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이 도시의 '산 페르민' 축제를 묘사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축제는 이름은 몰라도 다들 한번쯤 본 적이 있는 그 유명한 소몰이 축제다. 중세 도시의 좁은 골목에 소들을 풀어 놓고 흥분한 소들의 앞을 뛰어 다니는 축제가 바로 그 '산 페르민'이다. 이 축제를 할 때는 작고 조용한 이 도시에 주민수의 몇 배나 되는 관광객들이 몰린다고 한다.


시청사를 지나 순례자들이 묵는 숙소(알베르게)를 찾아 걷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고 수십대의 페라리들이 길을 지나고 있었다. 스페인의 페라리 동호회인지, 페라리에서 주최하는 행사인지 모르겠지만 경찰까지 나와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옛날 페라리부터 최신형 모델까지 한번에 이렇게나 많은 페라리를 본 것도 난생 처음이었다.





순례자들은 순례자용 숙소(알베르게)를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데 순례자임을 확인하는 증명서가 순례자용 패스포트이다. 이것은 도시의 큰 알베르게에서 발급 받을 수 있다. 이 패스포트에 지나는 마을이나 알베르게에 있는 스탬프를 찍어서 내가 이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하는데 각 지역의 스탬프의 모양이 모두 다르고, 그 모양이 그곳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들이라 패스포트에 늘어가는 스탬프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팜플로나의 알베르게에서 패스포트를 사고 하룻밤을 여기서 묵었다. 이곳의 알베르게는 고풍스런 건물에 크기가 무척 커서 수십개에 달하는 2층 침대가 커다란 공간에 꽉 들어차있었다. 그래도 시설은 깨끗하고 낡지 않아서 좋았지만 하루종일 걷느라 지친 순례자들의 코고는 소리가 심하기 때문에 소리에 예민한 사람들은 그들이 잠들기 전에 얼른 자는게 좋다.

고풍스러운 건물의 알베르게. 시설도 나쁘지 않았다.


새벽 6시 전에 일어나 짐을 꾸리고 6시쯤 알베르게를 나왔다.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하늘과 아무도 없는 골목이 조금 쓸쓸하게 보이지만 이 때는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이며, 이번 여행의 목적중 하나였던 순례자의 길을 드디어 걷는구나 싶어서 조금 흥분 상태였다.



각 도시마다, 지역마다 순례자에게 길의 방향을 알려주는 표식이 다르다. 팜플로나는 비교적 큰 도시라 위의 사진처럼 깔끔하게, 그리고 촘촘하게 표식이 설치되어 있다. 시골로 들어서면 페인트로 칠한 화살표시, 나무표지판, 리본 등등으로 되어 있고 표식간의 간격도 띄엄띄엄 떨어져있어서 간혹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7월말의 스페인 북부지방은 밀 추수가 다 끝나있었다. 밀알은 없지만 밀대는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곳곳이 모두 황금색 들판이었다. 대신 이때의 스페인 들판은 해바라기가 한창 필 시기였다. 길을 따라 몇 송이 핀 해바라기가 아니라 넓은 들판에 끝도 없이 해바라기꽃이 펴 있는 광경은 처음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이쪽 지방은 산이 대부분 구릉형대이며 높고 험하지 않아서 산꼭대기까지 모두 밀이나 해바라기를 키우고 있었다.



엄청난 수의 해바라기를 만났다. 처음엔 그냥 우와하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도보 순례자이긴 하지만 자전거로 다니는 사람도 꽤 많고, 간혹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순례자 기념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보 여행길이지만 가끔 무리한 일정이나 건강상의 이유로 길 위에서 사망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가 사망한 자리에 세워진 조그만 기념비에 순례자들은 조그만 돌을 올려놓거나 꽃을 헌화하며 일면식도 없지만 마음속으로 그를 애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팜플로나를 떠나 두세시간쯤 걸었을까, 언덕위에 조그만 마을이 나왔다. 전날 미리 아침식사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마을에서 간단히 요기를 해야한다. 조그만 가게에서 빵과 과일을 사서 성당 돌위에 퍼질러 앉았다.


길을 걸으며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물과 음식이 떨어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자주 조그만 마을이 나오지만 간혹 한동안 마을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한낮엔 35도를 가뿐하게 넘어가는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무사히 걸으려면 배낭에 여분의 물과 음식은 필수사항이다.


스페인의 태양은 정말 뜨겁다. 하루종일 길을 걸으며 몇 리터의 물을 마시더라도 소변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땀도 바로바로 증발되기 때문에 옷이 땀에 절긴하지만 완전히 젖어 축축해지지 않는다. 햇볕에 화상을 입지 않으려면 썬크림도 필수다. 귀찮으니 한시간쯤 어떠냐고 무시했다간 나처럼 숙소에서 한쪽 벌겋게 익어버릴 어깨를 보게될 것이다.



길을 걷는 동안 풍력발전을 하는 프로펠러를 정말 자주 볼 수 있었다. 바람이 조금 센 언덕에는 어김없이 프로펠러가 있었는데 능선을 따라 수십개의 프로펠러가 늘어서 있기도 했다. 참고로, 스페인은 대체 에너지 사용률이 꽤 높은 국가라고 한다.



바람이 세기로 유명한 언덕에 올랐다. 언덕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그 언덕에서 맞은 바람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사진으로는 맑은 하늘이라 바람이 세게 불 것 같지 않지만 어찌나 바람이 센지 언덕에서 쉬는 사람들은 모두 바람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이 언덕 꼭대기에는 아래 사진처럼 그 옛날 순례자들이 바람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조형물이 있다.




한동안 걷다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태양도 점점 뜨거워졌다. 첫날 팜플로나로부터 23킬로미터 떨어진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걸을 계획이었다. 6시부터 걸었으니 쉬거나 식사하는 시간을 빼고 4,5시간쯤 걸으면 점심때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더위로 쉬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도착시간도 조금 늦어졌다.



인상적이었던 성당 앞의 십자가상



점심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을 외곽에 있는 알베르게를 찾아서 식사를 하고, 빨래를 해서 널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배낭 무게를 줄이느라 최소한의 옷가지만 챙겨서 다니기 때문에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다들 그날 입은 빨래를 해서 널기 바쁘다. 자칫 게으름을 부리면 이튿날 소금기로 하얗게 얼룩진 옷을 다시 입고 걸어야한다.


첫날이라 그런지 23킬로미터를 넘게 걸었어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준비없이 오게되면 훨씬 힘들었겠지만 수개월을 무거운 배낭과 동거동락했더니 기본 체력이 훨씬 좋아진 것 같았다. 게다가 첫날엔 체력이 남으니 걸으며 찍은 사진도 꽤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30일이 넘게 걸어야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다. 날이 갈수록 체력이 떨어질게 분명했다. 알베르게에서 저녁까지 사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날 알베르게에서 한국에서 온 대학생을 만났다. 방학이면 다들 유럽여행을 하는데 그러지않고 이곳으로 온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유럽여행은 나중에도 할 수 있겠지만 여기는 그러기 힘들지 않겠냐며 자신이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경비를 모아서 왔다고 했다. 꽤 기특한 친구였다.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돌아오면서부터 시작된 유럽여행은 벌써 두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유럽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1달밖에 남지 않았다. 쉥겐조약에 가입한 유럽국가들은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편리함이 있지만 이 국가들을 모두 합해서 90일을 넘길 수 없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가끔 90일을 넘기더라도 다른 대륙으로 출국하는데 문제가 없었다는 여행자도 있었지만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영국이나 모로코 같은 북아프리카로 잠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90일이 리셋되긴하지만 쓸데없이 교통비를 들이는 것보다 남은 30일을 충실히 보내는게 낫겠다 생각했다.(당시는 2012년이라 지금은 이 쉥겐조약이 어떤 변화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유럽에서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앞으로 가야할 남미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행을 떠나며 가장 해보고 싶었던 일중에 하나가 산티아고 데 까미노 즉, 산티아고까지 가는 순례자의 길을 걷는 일이었다. 이 길을 완주하려면 빨리 걸어도 한달 남짓한 시간이 걸리므로 남은 한달을 오롯이 다 써야했다.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2주씩 나누기로 했다. 순례자의 길은 꼭 어디서부터 걸어야 한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니 이번에는 2주동안 걸을 수 있을만큼 걷고 남은 2주는 스페인의 다른 곳을 여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25kg이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는 도저히 순례자의 길을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여행기를 보면 걷다보면 힘들어서 1g이라도 덜어내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서 절대로 10kg을 넘기지 말것을 권장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바르셀로나의 민박집에 미리 연락해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2주만 나머지 짐을 보관해 줄 수 있는지 문의했고 다행히 사정을 이해해주는 민박집을 찾을 수 있었다.


스위스 트래킹과 새벽부터 제네바 공항에서 체력을 다 소모해버렸기 때문에 민박집에서 몇 시간 더 눈을 붙이고 오후 이른 시간에 바르셀로나 시내 여행을 시작했다. 바르셀로나에 대한 정보도 찾아놓지 못했지만 바르셀로나하면 떠오르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부터 찾아갔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 중 하나이니 당연히 사람들이 무지 많았고 입장 티켓을 사려는 줄은 이미 모퉁이를 돌아서 이어져 있었다. 땡볕에 기다렸다 티켓을 사서 들어가더라도 오늘의 멍한 정신으로는 제대로 머리에 들어올 것 같지가 않았다. 어차피 순례자의 길을 다녀온 후, 짐을 찾으러 돌아올터이니 그때 다시 와야겠다 생각하고 이 날은 성당의 겉모습만 날림으로 보고 돌아섰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다. 가우디가 만든 건물들은 1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의 자연을 형상화한 건축물의 독특함은 독보적으로 평가 받는다. 그가 만든 건물중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만 7개라니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와 맞먹는 근대 최고의 건축가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신경 쓰지도 않고 걷다보니 사진에서 많이 본 건물이 보였다. 까사 밀라였다. 주거용으로 지어진 가우디의 건축물은 지금도 주거용으로 사용되거나, 박물관, 전시관 등으로 사용되는데 입장료가 하나같이 무척이나 비쌌다. 단기여행으로 주머니가 두둑했다면 당연히 들어갔겠지만 주머니도 가벼운데 그 가격을 지불하고 입장하고 싶지 않았다. 이때 이미 인간이 만든 예술품보다는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에 마음이 기운 상태였던 것 같다.




조금 더 걸어내려가니 까사 바트요가 나왔다. 역시나 입장료가 만만치 않다.



해변쪽으로 걸어내려오니 바르셀로나의 구시가가 나왔다. 뒤에 있는 건물이 바르셀로나 대성당이다. 유럽 대부분의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그 도시의 대성당인데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가려 있다. 스페인의 성당은 이탈리아나 독일, 오스트리아의 성당과는 구조나 모양이 또 달랐다.






구도심의 골목을 걷다보니 옛날 아라곤의 왕이 살았다는 주택이 나온다. 왕이 살았으니 궁전이어야 할텐데 그리 규모가 크거나 화려하진 않았다. 아마도 스페인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강력한 중앙집권국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고 이슬람이나 다른 국가의 침입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인 것 같다.



걷다보니 어느새 바르셀로나 항구까지 도착했다. 항구에는 콜럼버스가 타고 신대륙으로 향했던 산타 마리아호를 복원한 배가 떠 있었다. 콜럼버스는 당시 카스티야 왕국을 지배했던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신대륙을 향해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복원한 산타 마리아호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대서양을 가리키고 있는 콜럼버스의 동상이 보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여행자들이 많이 모이는 리세우 거리까지 왔다. 여기는 리세우 극장외에 여러 공연장과 레스토랑, 여행자를 위한 다양한 숙소들이 있어서 항상 여행자들로 붐빈다. 서늘했던 스위스의 날씨에 적응했던 몸이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에 아직 적응을 못했는지 여기까지 와서는 녹초가 되어 버렸다.


민박집에서 알려준 플라멩코 공연을 보고 스페인의 대표적인 음식 빠에야를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플라멩코는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오래전 핸드폰 CF에서 유명한 여배우가 빨간색의 레이스장식의 드레스를 입고 추던 그 춤과는 완전히 다른 춤이었다. 플라멩코라하면 막연히 정열적인 춤이라고만 들었었는데 나에겐 종교적인 느낌이 강했다. 댄서의 빠른 몸놀림과 환희에 찬 표정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좀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슬람의 수피댄스처럼 접신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기대하고 달라서 그런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데 꽤 충격적이었다.

8박 9일은 스위스를 여행하기에 말도 안되게 짧은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마터호른과 융프라우에 초점을 맞추고 이 정도 일정이면 되겠거니 하고 왔지만 더 다양한 곳을 트래킹하고 가보지 못한게 아쉬웠다. 다음 여행지인 스페인행 저가항공편을 구입해 놓지 않았더라면 일정을 조정했을지 모르겠지만 유럽의 저가항공편은 무척 저렴한 대신 취소하는데 드는 비용이 너무 높았다.


그린델발트에서 스위스의 마지막 여행지 제네바로 가는 기차를 탔다. 제네바는 UN산하의 국제기구가 많은 곳이며 각종 국제적인 행사가 열리는 도시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관심이 가는 곳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네바로 갔던 이유는 바르셀로나로 가는 저가항공편이 제네바에서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그린델발트에서 묵었던 숙소에서 떠나는 날 아침은 스위스에 온 뒤로 가장 화창한 날이었다. 산은 이제야 여행자에게 마음을 풀고 보여줄 준비가 되었는데 조급한 여행자는 벌써 떠날 준비를 마쳐버린 것이다. 많이 아쉬웠다.


숙소 거실에서 보이는 풍경. 마치 산장 같은 분위기다.


오늘은 산허리에 구름도 두르지 않고 말끔한 모습을 드러냈다.


제네바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본 호수



제네바에서는 하루를 묵고 이튿날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했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 있는 숙소를 예약했다. 가격이 무척이나 비싸서 그동안 여행하면서 묵었던 숙소중에 가장 비싼 곳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제네바는 물가가 어찌나 비싼지 스위스에서도 숙박비가 독보적으로 비쌌다.


공항에 내려 배낭을 짊어지고 숙소를 찾았지만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고도가 높은 째르마트나 그린델발트에서는 늦여름 혹은 초가을 날씨였는데 고도가 낮은 제네바는 한여름이었다. 


한시간이나 헤매고 다닌 끝에 찾은 숙소를 앞에 두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숙소에서 먼저 보인 것은 20대의 서양 여자애들이 베란다에서 부서진 차양과 씨름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겉보기에도 무척 낡고 음침해 보였다. 마음을 추스르고 들어가니 어두컴컴한 리셉션에 젊은 흑인이 앉아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선입견을 갖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영화에서 본 뉴욕의 할렘가에 있는 어느 호텔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차피 잠만 잘거니까, 내일 새벽에 떠날텐데, 얼마나 비싼 돈을 지불했는데 등등을 생각하며 체크인을 마쳤다.


방에 짐을 던져 놓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제네바 시내로 가서 호숫가 잔디밭에 누워 시간을 보내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다시 들어가기 싫은 그 호텔로 돌아왔다. 나중에 제네바는 프랑스와 국경 근처에 있어서 버스만 타면 국경을 넘을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쪽에서 빈민층이 많이 넘어와서 도시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고 들었다. 멀리 알프스가 보이는 아름다운 도시지만 살인적인 물가와 도시 분위기는 썩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이튿날 새벽(아마도 네다섯시쯤 되었을 것 같다) 배낭을 매고 공항까지 걸었다. 길에는 사람도, 차도 없었기에 느긋하게 티케팅을 마치고 스페인에서의 일정이나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공항 대합실에 들어서니 사람들로 발디딜틈이 없었다. 거의 두시간동안 줄을 섰지만 아직도 두시간은 더 기다려야 내 차례가 될 것 같았다. 이러다 절대로 비행기를 탈 수 없겠다 싶어 지나가는 항공사 직원을 붙잡고 이야기하니 날 맨 앞에 데려다 주었다. 짐을 부치고 탑승구까지 전력질주하니 출발까지 겨우 몇 분 남아있었다.


호텔에선 거의 뜬 눈으로 지샌데다가 새벽부터 비행기를 타느라 고생했더니 제네바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4시간 동안 비행기가 언제 뜨고 내렸는지 아무 기억도 없이 쓰러져 잠들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 예약한 한인민박에 짐을 풀고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제네바에서 바르셀로나까지 가는 비행기 편이 100유로정도였다. 가방이나 짐의 무게에 따라 추가 운임을 내야 하는데 배낭이 커서 30유로쯤 더 들었던 것 같다. 유럽의 저가항공사는 우리나라 저가항공사처럼 대충 짐을 받아주는 일은 절대로 없기 때문에 돈을 조금 아끼겠다고 표를 예매할 때 추가 운임까지 지불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내야한다.


드디어 유럽의 마지막 여행지 스페인에 왔다.

다음날은 구름이 조금 있긴 했지만 어제보다 날씨가 많이 좋아져서 숙소 주변의 산들도 잘 보였다. 융프라우에서는 산악열차를 타고 융프라우요흐까지 올라가서 융프라우와 산들의 전경을 보는 것이 가장 유명한 코스다. 하지만, 나는 낮은 곳이라도 내 발로 다니면서 보고 느끼고 싶었기 때문에 트래킹을 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보는 전망이 정말 기막히게 좋았다.




트래킹을 하더라도 그린델발트에서부터 시작하면 당일치기로는 어려우니 케이블카의 도움을 받아야한다.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에서 보는 전망도 정말 멋있었다.

전형적인 스위스 풍경이 마치 달력 사진 같았다.



스위스를 여행한 기간은 총 8박 9일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케이블카를 몇 번이나 탓는지 기억도 할 수 없다. 그동안 살면서 탔던 케이블카보다 몇 배는 많이 탔을 것이다. 물가가 비싼 스위스다보니 케이블카 요금도 당연히 비싸다. 가장 높은 곳까지 가려면 여러번 갈아타야 하는데 올라가려는 높이에 따라 요금도 차이가 많이 난다. 버스나 지하철 표를 사듯이 케이블카 매표소에서 지도를 보며 노선과 도착할 정류장을 보고 표를 사야 한다. 



트래킹을 시작할 곳에 내리니 이미 수목한계선 위로 올라왔는지 나무는 보이지 않는데 너른 풀밭에 노란 꽃이 흐르러지게 피어있었다. 한 송이는 작고 볼품없는 꽃이지만 이곳저곳 무리지어 피어있으니 하늘, 구름, 풀, 꽃의 색들이 어우러져 보기 멋진 풍경이 만들어졌다.







약간 도드라지게 높이 솟아 있어서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언덕에 올라왔다. 이 주변에서야 언덕 같이 느껴지는 높이지만 실상은 2000미터가 훨씬 넘는 곳이다. 여기에 앉아 거대한 산봉우리를 보고 있으니 인간의 왜소함, 나약함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인간의 위대함은 인간 개개인의 힘이 아니라 개인이 뭉쳐서 이뤄진 사회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압도적인 자연과 마주하고 있으면 왠지 겸손해지는 것 같다.




이곳에는 까마귀가 무척 많았다. 제주도에서 자주 보이는 커다란 까마귀가 아니라 부리는 노랗고 발은 빨간 작은 까마귀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해코지하지 않으니 사람을 겁내지 않았다. 불과 1,2미터나 떨어져있었을까? 사진 찍어보라는 듯 포즈까지 당당하다.


이날은 하늘에 구름이 많지는 않았지만 하필이면 대부분 낮은 구름이라 산허리에 항상 구름을 두르고 있었다. 그래도 없어지겠지 하는 희망을 갖고 트래킹을 시작했지만 결국 융프라우는 하루종일 구름을 두르고 봉우리를 보여주지 않았다.



작고 볼품없는 꽃들이지만 수많은 꽃들이 모여서 온 들판을 노랗게 물들였다.

인간도 모이고 합심해야 큰 일을 할 수 있는건 마찬가지다.


산을 찍고 있는데 하필 앞에서 꼬마 트래커가 지나가다 뭔가를 줍다가 사진에 찍혔다. 우연히 찍힌 사진이지만 이 사진이 참 마음에 들었다. 


트래킹 코스가 무척 다양하고 많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도 무난히 걸을 수 있는 코스도 많다.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자식들 교육 방식이 다르고, 사람마다, 가정마다 많이 다르지만 서양 사람들이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는게 나는 무척 좋게 느껴졌다. 가족이 여행을 하는 경우에 대부분의 서양 사람들은 아이들에게도 각자 짐을 맡도록 하고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라면 가방에 좋아하는 인형이라도 넣어서 들게 했다. 아이들때부터 각자 짐의 무게를 느끼고 이겨내게 하는 듯하다. 좋아하는 것들을 무리해서 다 가지고 갔다가 짐의 무게로 힘든 경험을 하게 된다면 욕심을 절제하는 방법도 스스로 깨닫게 되리라 생각된다.


아주 잠깐 봉우리가 모습을 보였다 금새 사라졌다.











트래킹 종점은 융프라우요흐까지 다니는 산악열차의 중간역이다. 여기서 열차를 타고 그린데발트로 돌아왔다. 트래킹 코스는 무척 평탄해서 걷는 재미만을 생각하면 오히려 심심한 편이지만 경치가 무척 아름답고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야생화가 이곳저곳에 흐드러지게 피어있어서 지루하지 않았다. 여름에 융프라우를 찾는 여행자라면 하루쯤 시간을 내어 트래킹을 해보길 추천하고 싶다.


저녁은 그린데발트 마트에서 장을 봐서 숙소에서 만들어 먹었다. 놀라운 것은 그 물가 비싼 스위스지만 마트에서 사는 먹거리 재료들은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더 쌌던 것이다. 스위스에서 방목해 키운 소고기는 어떤 맛일지 궁금해서 스테이크 1인분 크기의 소고기를 샀는데 만원이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샐러드용 채소와 치즈도 무척 쌌다.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에 서비스를 받는 것들은 따라서 비싸지지만 원재료들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저렴한 것이다. 햄버거 세트 메뉴가 1만 5천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가격이지만 집에서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는데 드는 비용은 햄버거 세트 메뉴를 사는 금액보다 훨씬 적게 든다.


우리나라의 교통비가 싼 것은 물가지표를 올리지 않으려 요금은 억제하면서도 대중교통을 담당하는 기업이나 기관의 손실분을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정부의 꼼수일뿐이다. 사실 우리는 지원하는 그 세금만큼의 교통비를 더 지불하면서 타고 다니는 것이다. 게다가 식재료, 의복, 주거비는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비싸다.(특히나 식재료는 내가 다녀 본 어떤 나라보다 비싸다) 다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력들의 인건비가 과도하게 저렴하기 때문에 서비스 비용을 합하더라도 다른 나라보다 저렴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최저임금을 대폭 올려주고서 정작 정부가 잡아야 할 것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로하는 의식주와 관련된 물가들이다. 가진 사람들은 살기 편하고 없는 사람들은 살기 힘든게 우리나라 경제 구조다. 뭔가 심하게 잘못되어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