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틀리스는 봉우리가 평평해서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까지 갈 수 있지만 마터호른은 훨씬 높은데다 봉우리가 뾰족하고 좁아서 케이블카를 설치할 수 없다. 대신 3000미터가 넘는 마터호른이 잘 보이는 곳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갈 수 있다. 아침 일찍 케이블카를 타러 가면서 보니 봉우리가 구름 위로 살짝 드러나 있었다. 더 이상은 구름이 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케이블카에 올랐다.






마터호른 전망대로 오르는 케이블카는 엊그제 트래킹을 했던 쪽과는 다른 방향이다. 처음부터 급경사로 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나무가 자라지 않는 수목한계선을 넘고 있었다.


첫번째 케이블카 환승장에 내리니 지상에 있을 때보다 마터호른이 더 잘 보였다. 하지만 언제 다시 구름이 낄지 모르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볼 수 있는게 다행이다 싶었다.




옛날에 사용했던 대피소? 산장?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여기서는 아까보다 봉우리에 걸린 구름이 늘어나있었다. 며칠동안 머무르며 보다보니 마터호른이 주변 봉우리보다 훨씬 높아서 그런지 바람 반대편에서는 끊임없이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오늘 올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왔다. 안타깝게도 이 날은 케이블카의 고장으로 가장 높은 곳까지 갈 수 없었다. 원래는 아래 사진에서 오른쪽 중간 스키 슬로프처럼 생긴 곳으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구름이 살짝 끼긴 했지만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비가 오고 구름이 잔뜩 꼈었는데 이 정도도 어딘가 싶었다.




아무리 비싸더라도 끼니는 거를 수 없으니 점심을 먹어야 했다. 돈가스하고 거의 비슷한 음식을 시켰는데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3,4만원은 줬을 듯 싶다. 비싸지만 맛도 없어서 마터호른을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시내의 일반 음식점에서 이 가격에 이런 음식을 내줬으면 화가 났을 것 같았다.


식사를 하고 잠시 밖에 나오니 봉우리에 구름이 완전히 걷혀 있었다. 운좋게도 떠나기 몇 시간 전에 완전히 구름이 걷힌 마터호른을 볼 수 있었다. 마터호른에서는 계속해서 운이 안좋은 듯 좋고, 병주는 듯 싶다가 약 주는 일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여기서 보이는 마터호른은 방향이 맞지 않아서 흔히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다.






이제 째르마트를 떠나 융프라우로 갈 시간이 되었다. 마터호른은 워낙 깊은 산골짜기에 있어서 보기 위해서는 무조건 째르마트에서 숙박을 해야 하지만 융프라우는 주변에 큰 도시나 마을들이 여럿있어서 반드시 한 곳에 머무를 필요는 없었다. 융프라우를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경우에는 흔히 인터라켄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만 좀 더 시간에 여유가 있는 여행자라면 그린델발트나 라우터브루넨에 머무르는게 좋다. 나는 고민 끝에 유명한 아이거 북벽이 잘 보인다는 그린델발에서 묵기로 했다.


스위스를 기차로 여행하다보면 곳곳에 아름다운 호수를 볼 수 있는데 이 날은 약한 비가 흩날리는 날씨라 청명한 호수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대신에 호수위에 뜬 선명한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그린델발트에 가까워지면서 슬슬 산이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골짜기 사이에 걸린 무지개도 무척 예뻤다.


그린델발트는 해발 1000미터가 약간 넘는 곳이고 째르마트처럼 깊은 산골짜기에 위치한 곳이 아니라서 훨씬 덜 춥게 느껴졌다. 날씨만 맑았다면 전형적인 스위스 풍경 사진과 가까울 듯했다.


아이거 산에서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다.


그린델발트에 예약한 숙소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걷다보니 거세지는 빗발을 뚫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채 스마트폰에 캡쳐해둔 지도를 보며 힘들게 올라갔다. 오르면서는 높은 곳에 있는 숙소를 예약한 것을 후회했지만 숙소의 거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주 멋들어졌다.


아침부터 마터호른 전망대를 둘러보고 그린델발트까지 온데다 비까지 맞으며 걸었더니 몸이 녹초가 되었다. 숙소에는 멋진 부엌이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빈의 한인마트에서 비상용으로 산 라면을 끓어 먹고 곧장 침대로 들어갔다. 제발 내일은 날씨가 좋기를 기도하면서.

전날 흐렸던 날씨 덕분에 마테호른은 구름에 가려진 희미한 자국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튿날은 일어나자마자 부랴부랴 날씨부터 확인했는데 흐리다못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일단 날이 개기를 기다려보기로 하고 아침부터 맥도날드에 가서 죽치고 앉았다. 아침을 먹고 한참을 기다려도 비가 그치기는 커녕 빗발이 더 거세지는 것 같았고, 산꼭대기에는 눈이 내리는 듯 했다.(숙소나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산의 각 지점별로 기온은 몇 도인지 날씨는 어떤지 전광판에 보여준다.)


관심도 없는 째르마트의 쇼핑 상가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도 비는 그칠 줄 몰랐다.(산으로 유명한 곳답게 대부분이 아웃도어 용품점이다.) 오늘 마테호른 보는것은 포기하고 어두침침한 숙소 커피숍에서 다음 일정 계획을 세우며 다시 몇 시간을 보냈다. 


좋지 않은 일은 항상 방심했을 때 닥치지만 그것은 좋은 일도 마찬가지였다. 점심 때가 지나 밖으로 나오니 불과 몇 시간만에 하늘이 구름 한점 없이 개어버렸다. 분명히 좋으면서도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여기는 해발 1600미터, 설악산 대청봉보다 조금 낮은 곳이라 기상도 참 변화무쌍했다.


째르마트 시내에서 마터호른이 잘 보이는 개울 위 다리로 뛰어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며칠만에 모습을 드러낸 마터호른을 사진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도 몇 번의 사진을 찍고 트래킹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지만 내일 다시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어제 트래킹을 시작했던 곳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참고로 바젤에서 산 패스는 케이블카도 반값에 탈 수 있는 패스여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케이블카 가격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지갑은 금새 바닥을 드러내곤 했다. 베트남에서는 ATM기에서 한번 출금하고는 떠날 때까지 보름동안 쓸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보다 훨씬 큰 돈을 찾아도 얼마가지 못했다.


사방이 막혀 날이 개는 줄도 몰랐던 커피숍에서 나오니 마터호른이 보였다.


마터호른이 잘 보이는  곳을 찾아 부리나게 걸었다.


드디어 마테호른이 깔끔한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기가 조금만 더 좋았어도... 보통때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울 dslr이 이럴 때만 무척 아쉽다.


어제 트래킹을 시작했던 곳에 올라왔다. 탁 트인 전망에 마터호른만 악마의 발톱처럼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주변의 설산까지 너무나 깨끗하게 잘 보였다. 그 뒤로 스위스에서는 이보다 좋은 날은 만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4500미터의 산이 주는 위용이 이 정도인데 두 배 가까이 높은 히말라야는 어느 정도일지 무척 궁금해졌다. 언젠가 히말라야 트래킹을 가보고싶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이다.








높은 곳이라 해가 금새 기울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야 했다. 케이블카가 올라 온 방향으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표지판은 다른 곳을 가르키고 있었기에 조금 고심하다 표지판을 믿고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표지판이 잘못된 것인지, 내가 잘못 본 것인지 아니면 첫번째 표지판 뒤에 다른 표지판을 보지 못했던 것인지 가다보니 길이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이 다닌 자국은 있으니 가다보면 나오겠지 생각하고 계속 가기로 했지만 길이 꽤 험했다. 아까 길이 사라졌을 때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했을까 싶었지만 오르는 것보다는 내려가는게 편할 것 같아서 계속 걸었다. 한참을 걸어 내려오니 드디어 제대로 된 길이 나왔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이 나올까 싶어 잠시 긴장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길이 없어져버렸을 때, 모험하지 않고 다시 제대로 된 길을 찾았어야 했다. 여행은 모험이  아니니 굳이 험한 길을 택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선택을 굽히는 것도 용기인데 난 그 때 그러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그럴 수 있을지 확실하게 장담할 수는 없지만 한번 더 고민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걷다보니 마테호른과 째르마트가 같이 보인다. 잘못된 길로 왔지만 경치만큼은 좋았다.


내일은 융프라우로 떠나기 전에 조금 더 가까이에서 이 산을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마테호른 전망대로 가는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부디 내일도 날씨가 좋기를 바랬다.

알프스 트래킹을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지만 경로가 워낙 다양하다보니 어떤 경로를 선택할지가 고민이었다. 짧고 평탄한 노약자를 위한 코스부터 거의 등반에 가까운 최상급 코스중에서 적당한 코스를 고르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인터넷을 뒤지고, 스위스 관광청에서 만든 앱을 다운 받으며 신중을 기한 끝에, 산에서는 완전 초보이기 때문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가 대여섯시간 동안 걸어 내려 온 다음 산악기차 역에서 째르마트로 돌아오는 무난한 코스를 골랐다.


4500미터에 달하는 마터호른뿐만 아니라 주위에 3,4000미터급 봉우리들이 많다보니 일년내내 만년설로 덮인 곳들이 있어서 한여름이었음에도 스키를 타려는 사람들로 케이블카 정거장이 북적였다. 뿐만 아니라 산악 바이크, 승마, 트래킹, 등산하는 사람들로 째르마트 시내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하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산 위에 올라오니 그 많던 사람들이 다 흩어져 한적하기 이를데 없었다.


째르마트 출신의 유명한 등반가가 좋아했던 장소에 그를 기리기 위해 친지들이 벤치를 만들었다고 쓰여 있었던듯.


먼저 산을 관통해서 올라가는 궤도 열차를 타고 오른 후,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올라가야 한다. 째르마트가 높은 곳에 있는데다 궤도 열차에 케이블카까지 타고 오르니 트레킹을 시작한 높이는 2000미터를 훨씬 넘어있었다.




아쉽게도 이 날도 구름이 많은 날이었다. 마터호른이 보여야 할 자리는 구름에 쌓여 보이질 않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트래킹을 하기 위해 길을 찾으려 하다가 케이블카 관리소 옆에서 알프스에서 서식하는 산양들을 보았다.  뿔이 커다란 수컷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볕을 쬐고 있었다.


트래킹의 초반부는 멀리 보이는 산장까지 올라가는 완만한 오르막이었다. 하지만 분명 완만했음에도 2500미터에 가까운 높이다보니 생각보다는 힘들었다. 길 주변으로는 다양한 야생화가 무척 많이 피어있었다. 야생화의 특성상 크고 화려하게 피지 않기 때문에 언뜻보면 보잘것 없지만 자세히 보면 무척 특이하고 예뻤다. 알프스에서 본 야생화의 사진들은 예전에 한번 정리해서 썼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드디어 멀게 보이던 산장에 도착했다. 당연히 산장에서 이런저런 먹을 것들을 팔겠지만 분명 무척 비쌀테니 넓직한 돌에 걸터앉아 숙소에서 싸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이런 멋진 자연 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식사를 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오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맛볼 수 없는 경험이다.


이제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저 아래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 같으니 그 길까지 가기로하고 있는 듯 없는 듯한 길을 찾아 엉금엉금 아래로 내려왔다.




멀리 보이던 빙하가 상당히 가까이 보였다. 빙하 앞으로는 크고 작게 부숴진 바위들이 길을 만들며 산 아랫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불과 수십, 수백년 전만해도 빙하는 내가 서 있는 자리 앞까지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북극이나 높은 산의 빙하들이 녹고 있다는 것은 뉴스에서도 다큐멘터리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 온난화 때문이든 아니든 간에 자연이 바뀐다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여행을 하며 이런 거대한 자연 앞에 서게 되면 겸손한 마음이 들고, 내가 가진 것들이 하찮아진다. 조금 더 빨리 승진하려고 욕심을 부리고, 그래서 연봉을 조금 더 받고, 조금 더 비싼 옷과 자동차를 사면 받을 수 있는 만족은 유통기한이 너무나 짧다. 돈으로 사는 것들은 금새 망가지고 낡아버린다.


깎지 못한 머리는 점점 길어져서 어깨를 덮고 배낭에 든 1년 동안 입었던 의복은 모두 합해도 양복 한 벌 값도 채 안되지만 그 1년 동안은 내 인생의 가장 만족스러웠던 시간이었다. 원했던 대학교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입사했던 만족감은 얼마가지 못했지만 이 시간동안 얻게 된 감정들은 평생 가지고 갈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시간들을 다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알프스 트래킹 길도 길임을 알려주는 표시가 있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처럼 친절하지도 않고 자주 눈에 띄지도 않지만 띄엄띄엄 길이 맞다는 것을 알려주다. 분명히 표시를 봤고 그 뒤로는 갈림길이 없었는데 걷다보니 낭떠러지였다. 십수미터 건너편에 다시 길이 이어지는 것으로 봐서는 산사태나 그런 것으로 길이 끊겼나 싶었다. 아래를 보니 아찔했다.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조심 왔던 길을 돌아나왔다. 그 순간 한눈을 팔며 걸었거나 사진을 찍느라 정신 없었다면 큰일 날 수도 있었다. 산에서는 마음을 풀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저 앞은 낭떠러지... 길 없음


앞으로 높은 봉우리가 펼쳐진 멋진 경치를 앞에 두고 벤치가 놓여 있었다. 여기에 벤치가 놓여진 이유는 '하루에 몇 명이 벤치를 이용할 것인가, 여기에 놓는 것보다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에 두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이성적인 생각보다 '이 멋진 경치를 앞에 두고 평생 기억에 남을 순간이 될 수 있는 시간을 오랫동안 편안하게 앉아서 만끽하라'는 감성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몇 시간동안 완만한 길을 걸어내려오다보니 나무가 많아지고 날씨가 포근해졌다. 모퉁이를 지나자 보이는 에메랄드 빛 작은 호수가 보석처럼 눈에 띄었다.


한여름에도 높은 봉우리에서 눈이 녹은 물이 절벽을 타고 폭포가 되어 떨어졌다.


산에서는 날씨가 변화무쌍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왔지만 내리쬐던 햇살이 순식간에 구름에 가려진다.


째르마트로 돌아갈 산악열차가 다니는 역에 거의 다다를 때쯤 저 아래 째르마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첫번째 알프스 트래킹은 무난하게 끝이 났다. 비록 흐린 날씨 때문에 기대했던 마터호른은 볼 수 없었지만 내일은 날씨가 좋아질지 모르니 기대를 접지 않았다. 


원래 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별히 마터호른이 멋진 산이기 때문도 아니다. 바다가 주는 매력과 산이 주는 매력은 완전히 다른 매력이었다.(고양이과 개의 차이처럼?) 여행하면서 자꾸 고양이가 좋아졌던 것처럼 이젠 산이 좋아지려고 했다.

스위스에 온 이유가 웅장한 알프스 산을 보고 트래킹을 하기 위해서였으니 여행지 우선순위도 자연히 거기에 맞춰졌다. 우선은 마터호른이 있는 째르마트에 며칠 머무르고 이후에는 융프라우로 넘어가기로 했다. 루째른에도 리기, 티틀리스, 필라투스 같은 산들이 있고 숙소 민박집 사장님도 루째른 근처 산들이 더 좋다며 계속 머무르길 권했지만 마음은 이미 마터호른에 가 있었다.


하지만, 루째른에서 째르마트로 가는 적당한 시간의 기차가 오후에 있었고 루째른 시내에서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짐을 꾸려 기차역 사물함에 넣어두고 티틀리스 산으로 향했다.


티틀리스로 가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었지만 갈때는 우선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넌 후에 기차로 갈아타고 갔다가 올때는 시간이 촉박하니 기차로 바로 돌아오기로 했다. 호숫물도 잔잔하고 주변 풍경도 아름다웠지만, 하늘에 제법 구름이 많아 과연 티틀리스 정상이 보일지 걱정됐다.




남미 파타고니아를 여행하기 전까지는 이런 풍경은 알프스가 최고일 줄 알았다.


기차로 갈아타고 티틀리스로 가는 중


3000미터에 달하는 티틀리스 산 정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긴 케이블카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 

4000미터가 넘는 마터호른이나 융프라우도 마찬가지다.



케이블카가 위로 올라갈 수록 구름이 많아지다가 급기야 하늘이 죄다 하얀색으로 변해버렸다. 티틀리스가 나에게 모습을 보여주는 행운은 없을 듯했다.




꽤 올라왔는지 7월 중순인데도 주변에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티틀리스에 오르는 중에 한번은 커다란 곤돌라를 타게 되는데 세계에서 최초로 생긴 360도 회전하는 곤돌라라고 한다. 그러면 뭐하나 주변은 온통 구름과 눈뿐이라 보이는게 없는데...


마지막 곤돌라에서 내리면 티틀리스 산의 빙하를 깎아만든 통로를 통해 정상으로 갈 수 있다. 그야말로 오랫동안 쌓여만들어진 거대하고 단단한 얼음덩어리다.




드디어 산 정상으로 나왔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발밑의 때묻은 눈과 사방을 하얗게 만드는 구름뿐이었다. 중동에서 온 듯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는데 이들은 눈을 처음본다는게 얼굴에 씌여있는 듯, 아이들처럼 좋아했다.




가끔 구름이 옅어지고 파란하늘이 살짝 드러나곤 했지만 금새 다시 구름으로 덮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 없나보다.


한여름 여행을 하다가 여기에 온다고 있는 옷들을 꺼내 겹쳐 입었지만 밖에 있었더니 금새 추워졌다. 산 정상에 있는 카페에서 라떼를 한 잔 마시며 몸을 녹이고 이제 째르마트로 가기 위해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티틀리스는 원래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마터호른은 모습을 보여주겠지'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몇 번 이야기했지만 빨리 포기하고 다음을 더 기대하면 여행이 편해진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루째른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까지 걷다보니 멀리 알프스의 높고 거친 봉우리들이 보였다. 어제까지는 비싼 물가로만 느껴지던 스위스가 이제 확실히 인식되기 시작했다.


루째른에서는 융프라우가 있는 인터라켄이 가까워서 가기가 훨씬 편하다. 반면 마터호른이 있는 째르마트는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기차를 타고 알프스 깊숙히 들어가야하고 해발 16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한여름에도 아침저녁으로 무척 춥다. 그래도 째르마트에 먼저 가게된 이유는 세계 10대 미봉 중 하나라는 마터호른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생각과 함께,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마을에 내연기관으로 움직이는 차를 없애고 전기차만 다닌다는 것에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째르마트로 가는 기차 좌석 앞에는 열차가 통과하는 기도가 그려져 있어서보니, 열차가 통과하는 계곡 주위의 산들이 3,400미터 이상의 높은 산들에다 째르마트는 이 열차의 종착역이었다.


열차가 지나는 계곡 위 가까이에 빙하가 보였다.



드디어 째르마트에 도착했다. 기차역은 마을의 입구에 있어서 숙소들이 있는 안쪽까지는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돈이 많은 여행자라면 택시(사진에서 초록색)를 타겠지만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스위스에서도 또 유명한 째르마트니 감히 가격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마을이 크지 않아서 걸어 다닐만하다. 무거운 배낭을 앞뒤로 매고 여행한지 5개월이니 걷는다는 것에 대한 점점 부담은 줄어들고, 걸을만하다고 인식되는 거리는 점점 늘어났다. 내일은 처음으로 알프스 트래킹을 한다는 기대로 마음이 한껏 들떴다.



퓌센에서 스위스 루째른까지 가는 방법은 기차를 타는 수밖에 없지만 그다지 추천할게 못된다. 직선거리로는 멀지 않지만 거대한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기차를 몇 번 갈아타고 빙돌아서 바젤까지 간 다음에 스위스 철도로 갈아타야하기 때문이다. 세 번정도 갈아타면 바젤까지 갈 수 있었고, 거기서는 스위스 국내 기차로 갈아타고 루째른까지 가면 되었다. 시간도 고려하고 기차편도 잘 알아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항상 실수는 마음을 놓는 순간 부지불식간에 다가왔다.


몇 개의 작은 시골마을을 지나고, 걱정보다 쉽게 기차를 갈아탔다.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할 즈음 작은 기차역에 멈춰있던 기차가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원래 그런건가보다 생각하고 있었더니 다음에 멈춘 기차역에서 열차 점검을 하는 복장의 덩치 큰 아저씨가 기차 복도에서 어딜가는거냐고 물었다. 기차표를 보여자 독일어로 뭐라고 열심히 설명을 했다. 눈치껏 들어보니 이전 정거장에서 타고 온 기차의 앞 두세량은 목적지로 가고, 뒷 두량은 다른쪽으로 가는 열차로 분리가 되는 것이었는데 나는 뒷쪽 열차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차량마다에 목적지가 표시되어 있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분리되는 기차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목적지에서 갈아타기만 하면 바젤까지 쉽게 갈 수 있었는데 단단히 꼬여버렸다. 아저씨는 다음 열차가 몇 시에 오니 그걸 타고 어디로 가면 된다고 설명해 줬다. 그리고 배낭은 열차 안에 두고 가도 문제 없으니 몇 시까지 돌아와서 가지고 가라고 했다. 덩치 크고 무섭게 생긴데다 서로 말도 안통하는데 너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사실 아저씨라고 썼지만 나보다 나이가 어릴지도 모른다) 퓌센에서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아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은 체험했음에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든 배낭을 놓고 가자니 좀 걱정이 되긴했지만 굳이 가지고 가면 호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큰 맘 먹고 두고 가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원래 갈아타는 횟수보다 3번을 더 갈아타고서야 바젤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꼬인 것은 바젤의 기차역이 국경을 넘나드는 기차역과 스위스 국내를 다니는 기차역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다른 기차역으로 가서야 겨우 루째른행 기차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독일의 작은 마을 Oberstdorf역. 여기에 오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는데...


유럽 배낭여행을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유레일 패스를 사서 오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기차를 타면서 매번 가장 저렴한 표를 사는데 신경을 써야했다. 하지만 스위스는 산악국가라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기차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여행자들을 위한 다양한 패스를 팔았다. 나는 유레일 패스처럼 한번 사면 무료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티켓이 반값이 되는 패스를 샀다. 다양한 종류의 패스가 있으니 본인의 여행경로에 따라 가장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패스를 선택해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루째른에 도착하고보니 벌써 오후 늦은 시간이 되었다. 몸도 마음도 피곤한 상태에서 민박집을 찾아 들어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곳 민박집도 내 기호와는 영 맞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한시간쯤 주인에게 잡혀 본인의 화려한 과거 경력을 들어줘야했고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는데 이런저런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허접하나마 있는 부엌은 형식상 있는 것일뿐, 겸해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을 사먹도록 자꾸 유도하는 것도 기분 나빴다. 그렇다하더라도 피곤한 몸은 뉘여야하니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며 잠이 들었다. 


이튿날은 루째른의 유명한 명소인 카펠교에서부터 시내여행을 시작했다. 1300년대에 지어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나무다리인 카펠교는... 그냥 오래된 나무다리다. 다리보다는 다리가 놓여진 강물이 무척 맑고 깨끗하다는 것, 강에 수많은 백조들이 산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백조들이 엄청 몰려들기에 뭔가하고 봤더니 비닐봉지에 빵을 잔뜩 담아와서 백조들에게 나눠주는 아저씨가 있었다. 보기에는 우아한 백조들의 식탐은 장난이 아니어서 다른 새들은 얼씬도 할 수 없었다.





백조들의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비둘기나 참새같은 새들이 남은게 없나 보러왔다. 우리나라에서 닭둘기라 부르는 비둘기의 역할을 여기서는 백조들이 하고 있다는게 아이러니하다.



백조가 긴 목을 뻗고 날개를 퍼드덕거리면 꽤나 위협적이다. 가까이서 보면 몸집이 왠만한 아이들보다 더 크다.


호숫가를 어슬렁거리며 걷다보니 성당이 나왔다. 규모가 큰 성당은 아니었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살짝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성당안에 미사를 하는 동안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많은 성당을 가봤지만 이런 것은 볼 수 없었는데 

이 성당이 관광지의 역할보다는 종교적인 활동에 충실한 곳이라는 뜻인 것 같다.


성당의 뒷뜰에는 작은 공동묘지가 있었다.


루째른은 작은 도시라서 걸어다니며 구경하기에 좋다. 루째른 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듣고 나와서는 유명한 빈사의 사자상을 보러 갔다. 연못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조금 떨어져서 봐야했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에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키다 전사한 스위스 용병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로마 교황청에서도 그렇고 스위스 용병들의 용맹함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용병을 해야만했던 과거 스위스 사람들의 고된 역사를 알려주는 것이라 마음이 짠하기도 했다. 빈사의 사자상 뒤편으로는 빙하공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기에 그냥 지나쳤다.



루째른 시내에는 명품 시계의 본고장 스위스답게 시계를 파는 상점들이 무척 많았다. 쇼윈도에 진열된 시계들은 영어와 중국어로 가격이 표시되어 있었다. 중국인들의 구매력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되고 있었다.


유럽의 다른 도시들처럼 루째른도 구도심과 신도심이 나누어지는 성벽이 둘러져있다. 성벽은 조금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올라서면 루째른의 호수와 시내뿐만 아니라 멀리 알프스의 산들까지 보였다. 날씨가 맑았다면 훨씬 아름다웠겠지만...




루째른 성벽 곳곳에 오래전에 만들어진 시계가 있다. 시간이 되면 성벽에 설치된 종을 치도록 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지금도 동작하고 있다.




카펠교에서 시작한 루째른 시내구경이 루째른 구도심을 빙돌아서 다시 카펠교에서 끝이 났다. 루째른은 어딜가도 깨끗하고 예쁘장했다. 큰 볼거리는 없지만 하루정도 가볍게 둘러볼만한 곳들은 많았다. 그런데 문제는 뭘하든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스위스의 물가야 하도 유명해서 오기전부터 각오를 하고 왔지만 느껴보니 상상이상이었다.


버스 요금은 5000원 정도였고, 푸드코트의 가장 저렴한 메뉴도 20 스위스 프랑(대략 2만 5천원)이 넘었다. 그나마 먹을만한 메뉴가 12프랑(1만 5천원)하는 빅맥이나 와퍼 세트였다. 이렇게 물가가 비싼 곳이라면 숙소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으면 그나마 나을텐데 루째른에서 묵었던 숙소는 부엌을 사용하지도 못하게 했다. 물가가 비싸니 민박집 숙박료도 당연히 비쌌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아침과 점심을 포함한 숙박료가 스위스에서는 식사를 제외한 잠자리만 제공되는 가격이었다.


루째른은 깨끗하고 예쁜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리고, 여행지의 깨끗하고 예쁜 것에 크게 가치를 두지 않는 나는 마음이 점점 불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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