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회사 후배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갔었다. 겨울치고는 따뜻하지만 쌀쌀한 서울과는 다르게 부산은 아직도 선선한 가을 날씨여서 스웨터에 코트까지 입고 있으니 땀이날 정도였다. 그 뒤 터키 여행을 정리하다보니 쌀쌀했던 이스탄불과 다르게 괴레메와 파묵칼레에선 강렬한 햇살과 더위에 고생했던게 생각났다. 비교적 가까운 서울-부산 사이에도 이렇게 날씨가 다른데 이스탄불과 괴레메나 파묵칼레에서 한순간에 봄과 여름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파묵칼레를 떠나면서 다음 목적지로 정한 곳은 보드룸이었다. 보드룸은 터키 남서쪽에 위치한 지중해와 맞닿아있는 휴양도시다.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고급 휴양지에 머무를 일도 없지만 이 곳을 찾은 이유는 그리스 국경과 가까워 페리로 그리스로 넘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잠깐 머물렀지만 딱 하나의 풍경이 머릿속에 남아서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잊혀지지 않을 곳이 되었다.
파묵칼레에서 가까운 큰 도시 데니즐리의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크고 좋아보이는 버스가 늘어서있길래 편안히 가겠구나 싶었는데 시간이 되자 우리나라 마을버스 정도되는 크기의 버스에 타라고 했다. 게다가 받은 표는 다리도 앞으로 뻣을 수 없는 맨 앞자리였다. 이렇게 대여섯시간 되는 시간을 다리를 구부린채 가야만 했다.
한참 가다보니 기사 아저씨가 졸고 있는 것 같았다. 길도 썩 좋지 않은데... 어찌할까 전전긍긍하고 있을찰나 다른 터키 승객도 알아차렸는지 기사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잠을 깨우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붙였음이 틀림없다.
드디어 바다가 나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다. 조금만 더 힘내라, 내 다리.
조용하고 한적한 괴레메나 파묵칼레와 달리 보드룸은 휴양도시라 시끌벅적한 레스토랑과 술집도 많고 사람도 차도 번잡했다.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내린터라 잠시 터미널에 있는 삐끼를 따라갈까 고민하다가 맘을 고쳐먹고 어제 봐둔 숙소로 가려고 버스를 탔다. 그 날은 더 이상 버스를 타고 싶지 않았지만.
숙소에 짐을 풀고 숙소 주변 동네 구경에 나섰다. 숙소 주변은 시끌벅적한 번화가여서 점점 더 멀리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멀리 언덕에 풍차가 서 있는걸 발견했다. 그 날은 오후 늦게 어두워지는 시간이라 내일 가보기로 했다. 저기서 석양을 보면 정말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날 밤이었는지 다음날 밤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보드룸에 머무를 때, 유럽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있었던 것 같다. 여행하면서는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축구를 정말 열심히 봤었다. 시간대도 우리나라에서 볼 때는 한 밤중 혹은 새벽이었으나 훨씬 이른 저녁이나 밤이어서 보기에도 좋았다. 축구를 보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시끌벅적한 맥주펍에 들어갔다. 거기서 열심히 축구를 보고 있으니 서빙하던 남자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 차가 기아차란다. '기아, 굿~'이런다. 이럴땐 기분이 썩 괜찮아진다.
이튿날 아침에 일찍 항구로 나와서 내일 코스로 갈 배편을 예약했다. 그리고 항구에서부터 '내 멋대로 보드룸 투어'를 시작했다.
오호,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가 터키 보드룸 출신이란다.
보드룸 항구에는 정말 많은 요트들이 정박해 있었다. 커다란 요트부터 작은 고깃배, 옛날 범선 같은 요트부터 유럽의 부자들이 이용할 듯한 최신형 요트까지 다양했다. 내가 가장 갖고 싶었던 요트는 커다랗고 비싸보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위 사진에 있는 자그마한 요트였다. 이 정도는 어쩌면 나중에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일까?
작지만 아담한 배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낚시를 하고, 요리해서 나누고,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더울때 바다에 뛰어들고, 바다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이런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실 그런 삶이라면 이런 요트조차도 과분하다.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행동이 필요한 것이지 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요트 그늘 밑으로 뭔가 까만 것들이 움직이는 듯해서 보니 작은 물고기 떼가 수도 없이 많이 다녔다. 이렇게 많은 배가 정박해 있는데 신기하게도 기름냄새도 전혀 안나고 물위에 작은 부유물조차 거의 없었다. 바다를 가꾸는데 꽤 신경을 쓰고 있나보다. 터키 사람들 좀 멋진 구석도 있다.
요트에 필요한 물과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사진처럼 생긴 장치가 항구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오~ 이번엔 꽤 큰 물고기 떼가 지나간다.
아침부터 걷다보니 좀 쉬어야할 시간이 되었다. 게다가 지중해의 햇살은 정말 대단히 강했기 때문에 무리하다가는 드러누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겨우 4월말, 5월초의 햇빛이 이렇다면 여름 햇살은 어느 정도로 대단하단 말인가.(그 뒤로 그 여름 햇살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실컷 맛봤다. 그저 대단했다.) 쉬기 위해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사실 동네 찻집은 가더라도 스타벅스 같은 글로벌 체인점은 잘 안가는 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더라도 마찬가지인 스타벅스를 굳이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곳의 스타벅스는 테라스에 멋진 바다가 펼쳐져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커피값은 하겠다 싶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햇살도 조금 누그러졌다 싶을때 어제 결심했던 풍차가 있던 언덕으로 출발했다.
드디어 풍차가 있는 언덕에 도착했다. 어떤 것은 지붕까지 제대로 남아 있었지만 몇몇은 벽까지 거의 다 허물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는 풍차가 아쉬웠지만 좀 있으니 오히려 허물어지고 멈춰버린 풍차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유일하게 제대로 남아서 동작하는 듯한 풍차는 주위에 철책이 쳐져있고 지금은 풍차를 돌리는 시기가 아닌듯 잠겨있었다.
호기심 많은 송아지가 이방인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송아지에게 다가가면 어미인듯 한 녀석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콧김을 뿜기 시작했다. '오냐오냐, 니 맘 안다.' 더 스트레스 주기 미안해서 슬그머니 물러났다.
어디서 일하다 몰래 빠져나왔는지 터키 아저씨 두 명은 이 한적한 곳까지 와서 대낮부터 음주 중이다. 부러웠다. 나도 맥주 몇 캔 정도는 들고 왔어야했는데.
언덕 맨 뒷편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느 새 요트 한 척이 와서 스토클링을 하는지, 해산물을 잡는지 한참 머무르더니 사라졌다.
시간이 꽤 흐르고 해가 많이 기울었다. 한낮의 뜨거웠던 공기가 금새 차가워지고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석양을 보고 내려가겠다는 일념으로 추위를 견디며 기다렸다. 주위에 몇 있던 사람들도 다 사라지고 이 넓고 조용한 곳이 적막에 쌓였고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차츰차츰 내려오는 태양만 알려주고 있었다. 묘한 시간이었다.
보드룸 시내에 불이 하나둘 켜지고 태양이 산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 시간을 오롯이 보내고 내려왔다. 완전히 어두워지고 시내에 불이 모두 켜질 때까지 있고 싶었지만 내려가는 길도 걱정되고 더 이상 추위를 버텼다가는 감기를 앓을 것 같았다.
단지 그리스로 가기 위한 관문이었던 보드룸에서, 지금은 움직이지도 않는 풍차가 있던 언덕에서 침묵속에 석양을 보던 시간이 왜 이렇게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는지 잘 모르겠다. 잘 모르니 설명하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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