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도스의 바다에 빠져버린 다음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로도스의 바다만 보기로 했다. 아직 못본 기사단장의 궁전이나 박물관 등등은 관심 밖에 있었다.


로도스 시내에 있는 해수욕하기 적당한 해변은 대부분 동글동글하고 예쁜 자갈로 덮여 있었다. 햇살은 강렬하고 공기는 더웠지만 바닷물은 무척 차가웠다. 아직 바닷물이 데워지기는 이른 5월 초여서 그런가 싶다. 이 깨끗한 해변은 파도 거품은 커녕 소금기를 품은 바다 특유의 냄새마저 나지않는데다가 물이 차가우니 마치 계곡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숙소에서 빌려 온 큰 수건을 깔고 누웠다가 몸이 더워지면 바닷물에 몸을 담궜다. 넓은 해변에는 이른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그와중에 토플리스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여자들도 있었다. 에게해의 강렬한 태양 아래서 안그래도 여행하느라 서서히 갈색으로 변해가던 살갗이 진한 갈색으로 변해버렸다.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다 끼니 때가 되면 축구 중계를 해주는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했다.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



그리스의 물가는 그 뒤에 여행한 이탈리아나 독일, 스위스에 비해서는 저렴한 편이지만 그래도 유럽에 속한 곳이라 만만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로도스에서는 여행 경비에 대한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도 썼듯이 부엌이 달린 저렴한 숙소에서 묵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침에는 간단한 빵과 쿠키, 음료까지 제공했다.


아침은 숙소에서 주는 빵과 쿠키를 양껏 먹고, 저녁은 근처 수퍼에서 산 재료와 방콕을 떠날 때 한인 마트에서 보험용으로 산 볶음 고추장으로 찌개나 볶음을 만들거나 스파게티를 해 먹었다. 점심만 낮동안 돌아다니다 저렴하게 해결하면 되고, 터키처럼 비싼 입장료를 받는 관광지도 없었다. 유럽에서 보낸 3,4개월 동안 가장 저렴하게 가장 호사를 누리며 보낸 기간이었다.


숙소 앞에 있는 야외 소파. 쿠키와 빵을 잔뜩 가져다 여기서 먹었다.


아침 식사로 충분하다. 다만, 좀 창피하니 얼굴에 철판은 깔아야 한다.


어느새 나흘 밤이 지나고 내일은 페리를 타고 산토리니로 가는 날이다. 마지막 날은 그동안 미뤘던 기사단장의 궁전과 박물관 등등을 보러 갔다. 


기사의 길 끝자락에 있는 궁전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면 안쪽에 높은 벽으로 둘러쌓인 궁전이 나왔다. 궁전이라기 보다는 단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혹시 있을 전투에 대비하기 위한 용도로만 지어진 성과 같은 모양이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궁전을 보니 이 기사단이 얼마나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만을 생각하며 이 궁전을 지었는지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궁전 내부에 있는 소박한 성당


모조품이겠지만 라오콘 상이 있다.





궁전에서 가장 화려했던 방





궁전의 안뜰. 정원이 아니라 광장이다. 군사 훈련을 하지 않았을까.


궁전은 무척 단단하게 그리고 실용적으로 지어져있었다. 방들은 아주 소박했고, 건물에도 화려하게 장식된 부분이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100배가 넘는 오스만 군대에 맞서 2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이 성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궁전을 나와 어느 집 앞에서 아주 애교가 많은 고양이와 만났다. 이 녀석은 처음 볼 때부터 문앞 그늘에 무척 편안한 자세로 누워있었다.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누워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들고 있던 로도스 지도 가지고 장난을 쳐봤다. (어차피 내일이면 용도가 없어질 지도니까)


이 녀석이 장난을 너무 잘 받아준다. 열심을 다해서 장난치는게 녀석도 꽤나 심심했었나보다.



갈 목적지도 잊어버리고 한참 녀석하고 놀았다. 가다가 돌아서보니 예의 그 자세로 다음 같이 놀 상대를 구하고 있었다.


로도스 구시가에서 가장 높은 종탑이다. 개인 소유라 입장료가 무척 비쌌다. 패스~


이 녀석은 스타킹을 짝짝이로 신고 요염한 모델 포즈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로도스의 박물관이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박물관을 빠뜨리지 않고 방문하는 편이고, 박물관 구경을 좋아하는데 여기서는 가장 마지막에 반 의무감으로 갔던 것 같다.




박물관에는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대부분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하는 토기들이었다.


그리스 음식으로는 수블라끼와 기로스, 무사카 등이 있는데 수블라끼는 터키의 시시케밥과 비슷하고 기로스는 도네르 케밥과 비슷했다.(무사카는 먹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사진에서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위 사진은 기로스인데 빵이 좀 더 두껍고 야채와 소스가 조금 더 들어있다는 것 말고는 큰 차이가 없었다. 현지 음식 먹어보는걸 좋아하지만 터키에서 늘상 먹었던 음식하고 비슷해 보이는 외양이라 딱히 끌리지 않았던데다 여행 중 처음 조리가 가능한 부엌을 만난터라 매일 저녁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에 로도스에서는 그리스 음식을 별로 먹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섬으로 가는 페리가 없어서 우연히 길게 보내게 된 로도스. 이 우연한 행운으로 1년간의 여행지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남는 이 곳의 매력을 듬뿍 느끼고 갈 수 있었다.  5박 6일동안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12월 초 영하 10도에 가까운 지금은 이 곳의 태양과 바다가 더욱 그립게 느껴진다. 언젠가 다시...


어제 돌아다닌 로도스의 구시가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집과 상점, 골목들 위주였다면 오늘은 로도스의 역사와 관련된 곳들을 중심으로 가보기로 했다.


로도스 성 내부에서 성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입구


기사 단장의 궁전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기사의 길은 당시 기사들의 주거지 혹은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중세의 서유럽의 귀족 자제들 중에 첫째는 가문의 작위와 영지를 이어받지만 그 아래로는 받을 재산이나 영지가 없기 때문에 기사로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기사들은 국가별로 무리지어 공관을 두고 있었으며 기사마다 시종이나 마부들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기사들의 수보다 몇 배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신념이나 기사로서의 영광과 상관없이 주인을 따라 머나먼 곳까지 올 수 밖에 없었을 시종이나 마부들이 얼마나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했을지 불현듯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자갈로 덮여있는 기사의 길. 양쪽으로 기사들의 공관이 있는데 건물벽마다 그 기사들을 나타내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로도스 성 안에 있는 오래된 길들은 대부분 자갈들이 박혀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마차들이, 사람들이 다녔는지 돌들의 윗부분이 닳고 닳아서 평평해져 있었다.



기사의 거리에서 본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고양이


눈동자의 색이 달라서인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데 정작 고양이는 귀찮은 표정이다.

저 귀찮은 듯한 표정을 보니 괜히 사진 찍은게 미안해졌다.


천장의 벽돌과 흙이 일부 무너져 나무로 만든 바닥이 드러나있지만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다.



기사의 거리에서 나와 걷다보니 바다쪽을 지키는 망루가 있는 성벽까지 도착했다.




성벽 안쪽에서 바다쪽을 감시하도록 나 있는 구멍에 머리를 넣고 바라보자 환상적인 색깔의 바다가 바로 앞에 보였다.


거대한 크루즈 앞쪽으로 몇 척의 조그만 요트가 떠 있고, 누군가는 스노클링을 즐기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척의 거대한 크루즈와 페리가 정박하고 수많은 요트들이 다니는 항구의 바다가 이렇게 환상적인 물빛을 가질 수 있다니. 그 뒤로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유명한 해변에서도 이렇게 환상적인 바다색은 볼 수 없었다. 이집트의 후루가다나 멕시코의 카리브해에 가서야 다시 볼 수 있었던 그런 바다였다.





멀리 로도스의 거상이 있었다는 옛날 항구이자 지금은 요트 선착장이 보인다.


예전  로도스의 거상이 있었던 곳으로 가는 중에 뜻밖의 재밌는 녀석을 만났다. 이녀석은 너무 어려서인지 사람을 겁낼 줄 모르고 가까이와서 애교를 부렸다. 물론 목적은 먹을 수 있는 뭔가를 달라는 것이겠지만. 비교적 마른 몸이 안타깝기도했고,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애교 때문에 숙소에서 점심으로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꺼내 햄을 잘라 먹였다. 햄을 다 빼서 먹였는데도 조르는 통에 샌드위치를 갈라서 더 먹을게 없음을 보여준 후에야 돌려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차츰차츰 고양이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로도스의 거상이 있었다는 장소에 도착했다. 거상의 두 발이 위치했다는 곳에 지금은 양쪽에 암사슴과 숫사슴의 동상이 서 있다. 요트가 드나드는 선착장이라 물고기가 살지 않을 것 같은데 낚시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여행자에게는 역사적인 장소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낚시터로 더 의미있는 것 같다.




물결이 햇빛에 반사되어 격자무늬로 빛났다. 항구의 바닷물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맑았다.



이날 숙소에서 나올때는 성안에 있는 기사의 거리와 기사 단장의 궁전, 박물관들을 돌아보는게 오늘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바다에 접한 성벽에서 바다를 보고는 나머지 일정은 내일로 미루고 바다만 실컷 바라보다 왔다. 어렸을 때부터 바닷가에 살면서 바다를 봐 왔기에 산보다는 바다를 훨씬 좋아하긴 하지만 이 곳에서 이런 바다를 보게 된 것은 너무도 좋았다. 여행을 하면서 여러 곳의 좋은 바다를 많이 봤지만 내 최고의 바다는 로도스에 있다.


쓰고보니 온통 고양이와 바다 이야기뿐이다. 사실 기사의 거리니, 기사의 공관이니... 이젠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훌륭한 예술품이나 역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순간순간 오감을 통해 전해지던 느낌만 기억에 남았다. 나에겐 뜨거운 태양, 짙푸른 하늘과 바다, 향긋한 바다내음과 파도소리가 버무려져서 로도스로 남아있다.

이튿날, 어제 잠시 둘러본 구시가에서 로도스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기원전에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한 도시국가이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로도스의 거상으로 유명한 로도스는 지진으로 인한 파괴와 로마의 확장으로 쇠하였다. 다시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으로 성 요한 기사단이 본거지를 이스탄불에서 이 곳 로도스로 옮기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래서, 로도스의 구시가는 커다랗고 거대한 성곽으로 둘러쌓여 있다. 물론 로마나 중국처럼 세계에서 최고로 강대했던 국가의 도시만큼은 아니지만 일개 기사단이 이 정도로 거대한 성을 쌓았다는 것, 그리고 당시 최강국이었던 오스만 투르크의 군사력에 대항하여 200년이 넘게 이 곳에서 이슬람의 유럽진출을 막아왔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의 수백년에 걸친 신념이 경이롭다.




구시가 내에 있는 조그만 정교회의 모습. 크기는 작지만 내부는 상당히 화려하다.

정교회의 교회는 서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톨릭 교회와는 구조와 모양이 많이 달랐다.


도시 곳곳에 중세 전쟁시 거대한 투석기로 쏘았음직한 돌덩어리들이 놓여있다. 실제 사용되었던 돌덩어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도로와 인도를 구분짓는 경계석으로, 때로는 장식용으로 쓰이고 있다.


이전에도 썼지만 로도스가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보존된 중세 도시 안에서 지금도 사람들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관광지로써가 아니라 순수한 도시로서의 생명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어서 멸종된 동물의 박제가 아니라 실제 살아있는 희귀한 동물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골목마다 수퍼마켓, 정육점도 있고, 집 현관에는 꽃을 걸어놓았다. 오래되고 낡아 무너져내릴 것 같아 보이는 길이지만 한쪽 골목에서 중세 복장을 한 사람들이 쏟아져나온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다.




로도스답게 기념품 가게에도 중세시대의 갑옷이나 무기를 파는 곳, 그리스 신들과 관련된 기념품, 그리고 성 요한 기사 단 복장을 한 기사들이 기념품의 대부분이다. 기념품이 무척 다양하고 정교해서 사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가지고 다닐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무척 비쌀 것 같았다.


성밖으로 나가는 작은 문. 전쟁을 목적으로 쌓은 성 답게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있고 사이에는 넓은 해자가 있다. 성벽의 두께도 만만치않게 두껍다.





오래전 적들의 침입을 막기위해 외성과 내성 사이에 만든 넓은 해자는 지금은 잔디밭으로 변해서 가족들의 야유회 장소가 되었다. 유치원에 다닐 나이인듯한 아이들의 달리기 경주와 결승선에서 그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부모들의 모습이 우리네 모습과 똑같다.


해자의 가운데로 난 길과 잔디밭의 경계석은 드문드문 박혀있는 둥글고 큰 돌들이다. 그 길에서 덩치 큰 아빠가 조그만 아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뭔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이야기하는 아빠와 그 아빠를 바라보는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 정겹다.


코스에서 로도스로 갈 때 탓던 배는 내가 여행 중에서 탓던 어떤 배보다 크고 훌륭했다. 크루즈 여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의 에게해를 운행하는 이 블루스타 페리보다 나은 페리를 타기도 어려울 것 같다. 크루즈선 못지않은 크기에 수많은 차와 승객들을 싣고 에게해에 흩어져있는 그리스의 섬 이곳저곳을 다닌다. 다만, 그리스의 페리라도 다 같은 크기와 안락함을 주진 않는다.


아쉽게도 이 크고 훌륭한 페리를 찍은 사진이 없다. 페리 안의 까페에서 찍은 사진 한장 뿐이다.

코스와 로도스는 가깝기 때문에 비싼 좌석을 예매할 필요가 없다. 가장 저렴한 좌석을 끊고는 페리 안에 있는 여러 개의 까페 중에서 적당히 좋은 자리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다보면 어느 새 도착한다. 


로도스에 도착해보니 항구가 크고 그에 걸맞는 커다란 배들이 여러 척 정박해 있었다. 항구를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가야했는데 친절한 그리스 청년의 도움으로 겨우 버스를 타고 시내에 들어왔다.


로도스 시내는 여느 유럽의 다른 도시와 다를 것이 없다. 기럭지가 훌륭한 남녀들이 저마다 멋들어진 썬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이 때는 그리스와 스페인의 재정위기로 국제 사회가 시끄러운 시기였는데 여기는 그런 영향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사실 내가 그리스를 방문한 곳 중에서 아테네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국가의 재정위기가 국민들의 삶에 끼치는 영향이 실제로는 이 곳에선 그다지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도스에서 예약한 숙소는 인터넷에서 캡쳐해서 스마트폰에 저장한 지도로는 찾기가 어려웠다. 한참 시내를 헤매고 다니녔다. 어찌어찌 물어물어 찾고보니 시내 한복판에서 조금 벗어난(다행스럽게도) 곳에 있는 깔끔하고 깨끗한 곳이었다. 더구나 생각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했고 방에는 부엌이 따로 갖춰진 콘도형 숙소였다. 6월부터는 로도스 관광의 성수기라 내가 묵었던 5월 가격에서 몇 배는 더 비싸진다. 내가 절대 지불할 수 없는 비용임에도 2,3주의 차이로 이런 행운이 가능했다.


로도스의 거상이 서 있었다는 로도스의 구항. 신항은 여기서 오른쪽으로 한참 가야한다.


로도스에 오긴 했지만 로도스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책에서 본 것밖에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뒤 성요한기사단의 본거지였으며, 여기서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을 막았던 기독교 세력의 최전선이었던 곳으로 알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한 이틀 정도 둘러보고 산토리니나 크레타 섬으로 가는 페리를 탈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앞서 훌륭한 숙소를 싼 가격에 잡을 수 있었던게 비수기여서 그랬던 것처럼, 비수기였기 때문에 페리가 자주 다니지 않는 것이었다. 가장 빨리 출발하는 페리가 5일 후에나 온다고 했다. 


난감하고 당황스러웠다. 계획도 없는데 5일이나 이 곳에서 뭘해야 할지. 도리가 없으니 차츰 생각해보기로 하고 일단 구시가로 향했다. 포기가 빠른 성격이 어런 점에서는 꽤나 도움이 된다. 안되는건 안되는거니까 고민해봐야 의미가 없다.



오래전 마차가 드나들었을 성채의 입구는 구시가와 신시가를 연결하는 도로가 되어 차들이 다니고 있다.








성요한기사단의 성채는 생각보다 훨씬 컸고, 그 성채 안에는 중세의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그 유적에서 현대의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도스 후에도 중세의 성채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들은 종종 있었다. 이탈리아의 아시시, 스페인의 똘레도 같은 곳들은 구시가의 대부분이 관광지거나 관광지와 관련된 기념품점, 레스토랑, 숙박업소 등인데 반해서 이 곳은 수백년 동안 그냥 살아오고 있는 듯했다.


생각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다. 더구나 에게해의 바다는 놀랍도록 깨끗하고 맑았다. 어쩌면 페리가 없어서 억지로 있어야 하는 5일이 나에게는 행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로도스는 나에게 행운의 장소가 될 것 같았다.

드디어 보름 남짓한 터키 여행을 마치고 그리스로 가는 날이다. 터키에서 그리스로 가는 방법중에서 지중해를 통해서 가장 짧은 시간으로 가장 저렴하게 가는 방법은 터키 보드룸에서 그리스 코스로 배를 타고 가는 방법이었다. 아침 일찍 선창장에서 배를 타면 점심은 코스에서 먹을 수 있다.



보드룸에서 방금 출발한 배 안에서.



코스나 앞으로 갈 로도스는 그리스 본토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고 터키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다. 그래서 이쪽은 우리나라에 별로 알려져있지 않았서 한국 여행자들도 많지 않다. 특히 로도스는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면서 중세 십자군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유럽의 지중해 크루즈 여행에서도 빠지지않는 곳임에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두세 시간만에 도착한 코스에서 삐끼를 따라 숙소를 정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통해 숙소를 정하면 후회한다. 본인이 알아보고 결정한 것은 더 이상의 선택이 없었고 자신이 결정한 일이기 때문에 설령 숙소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후회할 일이 적은데 알아보지 않고 선택을 하면 항상 불만족스럽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었을지 후회하게 된다.


이 곳도 그랬다. 따라 간 숙소의 가장 작은 옥탑방을 내어주면서 이 사람은 '니가 이야기한 돈으로는 여기가 최선'이라고 했다. 항구에서 꽤 멀리 걸어왔기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내일이면 떠날 곳이니 그냥 머무르기로 했다. 그럼에도 샤워를 하러 들어간 욕실에서 녹물만 주구장창 나왔기 때문에 다시 후회를 하게 되었다. 한참만에 녹물이 줄어들었고 소심한 복수로 그동안 밀린 빨래를 죄다 해버렸다.


건조하고 강렬한 지중해 햇살에 빨래를 널고나서(옥탑방이라 빨래 널기는 최고였다.) 점심을 먹으러 해변으로 나왔다. 코스에서 또 한가지 아쉬운 것은 해변들이 거의 레스토랑에 딸린 프라이빗 비치였다는 것이다. 물론 현지인들이 가는 퍼블릭 비치도 있었겠지만 내가 머문 숙소주면은 죄다 그랬다.




아직 성수기가 아니어서인지 이쪽 지중해 해변은 물이 정말 깨끗하고 맑았다. 몇 달 후에 갔던 이탈리아나 스페인하고는 비교할 수 없었다. 아쉬운 것은 음식이다. 터키하고 가까워서인지 터키 음식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음식이 나쁘다기보다 그동안 물린 터키음식 외에 다른 것을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코스도 로마시대에는 무역항으로 꽤나 유명한 도시였다고 한다. 얼핏 유적들의 규모만 봐서도 도시가 크고 부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물도 없는 건조한 이 곳에 많은 달팽이들이 바위틈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수많은 생물들이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데 나는 내가 알던 환경에서 내 주위 것들만 보고 살아와서 달팽이는 당연히 습한 환경에서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이런 작은 것 하나하나를 통해 내 선입견과 내 자만심이 무너지고 내 사고의 한계가 넓어지기를 바랬다.






우리나라 토종 고양이 '코리안 숏헤어'와 비슷하게 생긴 그리스의 고양이

이렇게 생긴 고양이들이 우아하거나 화려하진 않아도 나에겐 가장 귀엽고 정감이 간다.


바닥에는 모자이크, 벽에는 벽화로 치장된 고대 로마의 고급 주택 터


점심을 먹고 한창 더울 때 코스 시내를 돌아다녔다. 코스 시내는 지중해의 여느 나라처럼 가장 더운 시간에는 낮잠을 자는 시간인지 가게들은 모조리 문이 닫혀 있었다. 무리한 탓일까... 컨디션이 갑자기 나빠졌다. 경험상 이럴땐 무조건 쉬는게 상책인지라 얼른 숙소로 돌아와 누웠다. 내일 떠나야하는 코스를 좀 더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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