쏭끄란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어제 하루종일 물벼락만 맞았던 나도 오늘은 본격적으로 축제를 즐기려고 난생 처음으로 물총을 구입했다. 아침을 먹고 거리로 나가보니 이미 물축제가 시작되어 있었다.



이렇게 대놓고 물총으로 물을 쏘고, 가끔은 얼음을 띄운 차가운 물을 양동이째 부어대거나 성능이 너무 좋은 물총에서 나온 물줄기가 얼굴을 직격하기도 하지만 아무도 기분 나빠하거나 성질을 내지 않는다.



더위에 지친 아주머니는 그늘에서 잠시 휴식 중


별의 별 물총이 다 있지만 이런 커다란 물통을 등에 질 수 있는 물통이라니...


축제를 즐기는데 남녀노소가 없었다. 꽤 나이가 많으신 할머니도 가벼운 차림으로 물총을 쏘고 있다.


가족들과 같이 나온 꼬마가 선글라스까지 끼고 물총을 열심히 쏘고 있자...


그 모습이 귀여웠던지 한 남자가 웃으며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머리 위로 냅다 물을 부어버렸다.


어안이 벙벙한 꼬마 명사수들이 아빠를 보고 있고, 아빠는 웃음보가 터졌다.


이런 과감한 복장을 하고 축제를 즐기는 이들도 있어서 여러가지 볼거리를 제공한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집중 표적이 된다.


오전내내 축제를 즐기고 잠시 쉬면서 점심을 먹고 나오니 구도심을 지나는 도로에 뭔가 시작되려는지 도로를 텅비우고 사람들은 길가에 쭈욱 서 있었다. 잠시 후, 타이 전통 복장을 한 여인들이 뭔가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을 시작했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도 행진하고,


꽃으로 치장한 예쁜 어린이들도 행진을 했다.



정치인 분위기의 중년 남자 뒤로 나타난 것은



화려한 수레에 실린 불상이었다.


쏭끄란 축제의 공식적인 행사는 1년에 한번 치앙마이의 모든 사원에서 준비한 화려한 수례에 불상을 실고 퍼레이드를 하는 것이었다. 치앙마이에는 사원이 매우 많기 때문에 불상이 실린 수레와 그 앞뒤로 행진하는 사람들의 퍼레이드도 끝없이 이어졌다. 유명하고 큰 사원에서 준비한 퍼레이드는 화려했고, 작은 사원의 퍼레이드는 소박했지만 사람들은 모두다 진지한 표정으로 준비한 꽃잎을 띄운 물을 불상에 뿌리고 한해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듯 했다.






퍼레이드 중간에 귀여운 복장과 앙증맞은 무당벌레 물총을 든 서양 여행자들의 모습이 재밌다.




불상에 부을 꽃잎 띄운 물을 정성스레 준비한 불신자


꽃잎을 띄운 물을 비닐에 담아서 팔기도 한다.



타이 사람치고는 꽤 키가 크고 훤칠한 남녀가 행진한다. 아마도 연예인인듯.


퍼레이드가 끝나고 다시 한바탕 물놀이를 하고


해가 뉘엿뉘엿 질때쯤 여행자들의 피곤한 몸을 쉬고 주린 배를 채워줄 어제의 야시장이 다시 선다.


어제 감탄했던 타이식 해물전을 한번 더 먹고 다시 야시장을 구경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여행을 시작한지 두 달째 이렇게 하루를 완전히 놀면서 보낸 것도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치앙마이의 쏭끄란 축제는 동남아에서의 여행을 마무리하며 그동안 쌓인 피로를 완벽하게 풀어준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타이에는 설날이 세 번이라고 한다. 태양력을 기준으로 해가 바뀌는 1월 1일과 불교에서 정하는 설날, 그리고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날(쏭끄란)이다. 처음에 이 쏭끄란은 건기 동안에 불상에 쌓인 먼지를 제거하고 서로가 건기를 무사히 지난 것을 기념하며 물을 부어주는 정화의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타이를 여행하기 전에도 쏭끄란이라는 물 축제가 있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이 쏭끄란이 이렇게 큰 의미가 있었는지,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나 성대하게 이 축제를 즐기는 줄은 여기서 겪어보고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았던 뜻밖의 축제가 너무도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라오스에서 아이들이 갑자기 어깨에 물을 부어주고는 수줍게 웃던 이유가, 어제 사원에서 승려들이 준비하던 행사가,  무엇이었는지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아침부터 거하게 먹고 시작했다. 흡사 갈비탕 맛이 나는 고기가 잔뜩 들어간 탕에 커다란 생선 한마리와 타이를 여행하며 반해버린 쏨땀까지... 이렇게 먹고 싶은 타이 음식을 잔뜩 시켜도 몇 천원 되지 않는 가격이라 자꾸 과식하게 되는게  유일한 문제였다.


시원한 얼음에 채운 생과일주스조차도 천원 안팎이었는데 이때는 동남아 물가에 길들여져서 이 주스가 너무 비싸게 느껴졌다. 훌륭한 타이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과일주스로 디저트까지 마신 후에 어제 다 들르지 못한 사원 구경에 나섰다.





성미급한 꼬마들은 집앞에서 이미 축제를 시작했다.


치앙마이 성곽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에는 성미급한 어른들이 뛰어들었다.




도심 외곽의 사원 구경을 마치고 다시 도심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 무작정 들어간 치앙마이 대학교 미술관.


축제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물총이나 자그만 양동이를 들고 지나가고 있다. 가게 앞에서는 아예 호스를 끌어다 놓고 지나가는 차에 물을 뿌린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인줄 알았다. 썽태우를 타고 숙소가 있는 구도심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물벼락이 쏟아졌다. 하루종일 다닌 여파로 풀어져 있던 몸에 차가운 물을 맞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타이인, 외국인 가리지 않고 지나가는 차에 물을 뿌린다. 더군다나 유리창도 문도 없이 뚫린 썽태우는 아주 좋은 표적이 되어서 심지어는 쫓아오면서 물을 뿌려댔다. 가만히 앉아서 비무장인 상태라 아무런 응사도 하지못한채 몸은 이미 완전히 젖어버렸다.



성곽이 있는 구도심에 들어와보니 이곳은 이미 난리가 났다. 내가 생각했던 쏭끄란이 아니었다. 훨씬 더 격렬하고 열정적이고 유머러스한... 남녀노소가 모두 즐기는, 그야말로 축제였다. 이렇게 한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물총싸움을 하면서 몇 날을 즐기는 이런 축제가 또 있을까?


상점들은 앞에 커다란 물통을 가져다 놓고 사람들이 공짜로 물총에 물을 담을 수 있게 해줬고 사람들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로 물을 쏘아대며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즐기다보니 한해 중에서 가장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기간이라고 했지만 정작 내가 있던 동안에는 사고가 발생하는걸 한번도 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 물놀이에만 집중했으며 밤이 되면 물놀이를 중지하고 술을 마시거나 낮동안 노느라 지친 몸을 쉬었다. 





전 세계의 물총 종류는 다 모여있는 듯하다. 이렇게나 다양한 물총이 있는 줄 미쳐 몰랐다.








구도심 밖으로 픽업트럭에 물을 가득 채운 드럼통을 싣고 천천히 지나가면 길에 늘어선 사람들은 그 차에 물을 쏘아대는데 이 날 최고의 인기인은 군인복장을 제대로 차려입고 물총을 진지한 표정으로 쏘던 사람이었다. 가장 집중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물총 세례를 받고는 장렬히 전사했다. 온 도시가 물에 흠뻑 젖었고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표정이었다.


나는 이 날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이나 하자고 나갔다가 하루종일 물세례를 받았다. 내일은 나도 물총을 사서 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치앙마이는 태국 북부에 위치하고 있고 비교적 남부지방보다는 연평균 기온이 낮은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비교적이라는 것이고 절대 시원하다거나 쾌적하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방문했던 4월 중순의 치앙마이는 여름의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웠다. 이 더위 속에서 돌아다니려면 잘 먹어야한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서 찾아간 곳은 일명 '보트누들'로 유명한 식당이다.




왜 보트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식당에서 국수를 퍼주는 아저씨의 자리가 배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어쩌면 바다나 강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배에서 끓여 먹던 국수는 아니었을까.


기원이야 어쨌든 국수맛이 일품이다. 국수 위에 숙주나 고수같은 야채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고기와 피쉬볼이 잔뜩 올라가 있고 MSG맛이 좀 나긴하지만 국물도 진했다. 방콕 까오산을 여행했던 사람이라면 짜오프라야 강변쪽에 있는 고기국수 집을 많이 가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곳의 국수가 더 맛있었다.


치앙마이 여행의 첫번째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의 서쪽에 있는 '왓 프라씽'에서 시작했다. 왓 프라씽은 치앙마이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사원이며 오래전 실롬(스리랑카)에서 만들어져서 이 곳에 보관되고 있는 신성한 불상이 모셔진 사원이다.






왓 프라싱에서 무슨 행사라도 있는지 긴 장대에 뭔지 모를 깃발(?)이 달려 있었고 입구에는 연꽃 봉오리를 팔고 있었다. 게다가 내부 전체를 촘촘하게 줄로 연결해 놓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 줄에는 지폐를 끼우도록 만들어진 길죽한 뭔가가 달려있었다. 이때는 처음이라 빈 곳이 많았지만 며칠 뒤에 다시 왔을 때는 더 매달 곳이 없을만큼 빽빽하게 달려있었다. 지폐를 끼워서 부처님께 공양하고 소원을 비는 것 같았다.


무심코 지나가다 깜짝 놀란 고승의 '밀랍인형'


존경 받았던 고승의 생전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예를 표하는 듯



동남아에서는 부처님이 큰 뱀위에 앉아있고 머리 위로 뱀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의 불상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동남아에 불교가 전파되기 전에 힌두 문명권이었기 때문에 힌두교의 '나가'가 불교화된 것인데 '나가'의 머리가 점차 부처님의 머리 뒤에서 보이는 후광으로 변했다고 한다.


불교에서 신성시되는 흰 코끼리


이 법당 앞에도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서 본 것과 유사한 나가의 모습을 한 뱀이 조각되어 있다.


행사를 준비하는 스님들


라오스에서 봤던 '공'이 매달려 있는데 공을 치고 소원을 빌 수 있다.


스님들이 수행하던 곳이라고 한다. 창문도 없고 내려올 수 있는 계단도 없다. 면벽수행이란 이런 것이었나보다.


더운 곳을 여행할 때는 무리하지 말고 자주 쉬어줘야한다. 왓 프라싱을 나와서 더위를 피해 와위 커피에 들어갔다. 방콕이나 파타야에는 스타벅스 같은 해외의 유명 커피 브랜드가 들어와 있고 가격도 우리나라와 엇비슷하게 비쌌는데 치앙마이에는 사진에서 보이는 와위커피라던지 블랙 캐년 커피 같은 현지 브랜드가 유명하고 가격도 훨씬 저렴하다.(아마도 현지 브랜드였던...)


사원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현 태국국왕이 청년시절에 수행했던 사원이었다. 태국에서는 사회 지도층일수록 젊은 시절에 일정기간을 사원에서 승려로 보낸다고 한다.




또 한가지 동남아의 불교 문화로 사원에서 파는 금박을 사서 불상에 붙이고 소원을 빈다. 며칠 뒤면 이 불상은 금박이 빽빽하게 붙여질 것이다.



사원에는 사진처럼 종들이 쭉 매달린 곳이 있는데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며 이 종들을 하나하나 치면서 지나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을 쳤는지 나무가 종과 닿는 부분이 닳아서 움푹 패여있었다.






방콕의 왓 프라깨오에 있는 태국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에메랄드 불상이 처음에는 이 곳 왓 체디루앙에 있었다고 한다. 지어진지 600년이 넘은 왓 체디루앙을 돌아 들어가면 16세기에 지진으로 소실된 거대한 본당이 나온다. 일부 무너져있지만 크기가 제법 거대했다.


하루종일 여러 사원들을 돌아다니느라 피곤하고 사원들의 이름도 헷갈릴 즈음 구도심을 관통하는 도로에 야시장이 서기 시작했다. 동남아에서는 더위를 피해 밤에 시장이 많이 서는데 야시장에서는 여러가지 먹거리와 악세서리, 기념품 등등을 팔기 때문에 구경하는 재미가 특별하다. 게다가 야시장의 규모가 꽤 커서 구도심의 양쪽 끝까지 노점들이 가득했다.




태국식 해물전인지 오므라이스인지... 전에다가 홍합, 오징어 같은 해산물과 숙주를 넣어서 주는데 빨간 소스에 찍어 먹으면 해산물과 아삭한 숙주가 어우러져 꽤나 맛있었다. 처음에는 과연 맛이 있을까 주저하며 주문했지만 게눈 감추듯 해치우고 또 다른 먹거리를 찾아 헤매게 되었다.





치앙마이는 바다와 접한 곳이 아닌데 조개, 홍합, 새우, 오징어 등등을 파는 곳이 많았다. 특히나 오징어 몸통을 잘라서 구워 파는 곳에서는 몸통의 일부분일뿐인데 그 거대한 크기에 가래떡인 줄 알았다.



치앙마이의 주말 야시장은 다양한 먹거리와 손으로 제작한 악세서리와 소품으로 이 곳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는 무척이나 유명한 곳이고 꼭 둘러봐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주말에만 열리기 때문에 여행기간이 맞지 않으면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주말도 아닌데 시장이 열렸으니 이상하다 하면서도 이 야시장이 그 주말시장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날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 라오스에서부터 궁금했던 그 수수께끼까지 다 풀리며...


여하튼, 일년간 여행하며 각지의 시장들을 봐왔지만 이 곳처럼 다양한 물품들을 저렴하게 파는, 그러면서도 품질도 상당히 좋은 곳은 없었던 것 같다. 맘껏 구경하고 먹고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야시장이라 생각한다.

라오스 루앙 프라방에서 태국 제2의 도시인 치앙마이로 가는 길은 언뜻 지도에서만 봐도 그리 녹녹한 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는 방법은 크게 2가지로 배를 이용하는 방법과 차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비행기도 있었던 것 같지만 배낭여행자에게는 배부른 소리라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배는 동남아 최대의 강이자, 세계에서 12번째로 긴 강이라는 메콩강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 다음에 태국쪽 국경을 건너 다시 차로 치앙마이로 가는 방법이었는데 정보가 정확한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만 2,3일이 걸리고 강의 상류다보니 앞에서 이야기한 강의 암초 등으로 무척 위험하다는 말이 있었다. 다음으로는 차를 타고 태국 훼이사이를 통해서 치앙마이로 가는 방법인데 루앙 프라방에서 오후에 출발하면 태국에서 오후에 도착한다고 했다. 가는 동안에는 배가 편할지 모르겠지만 힘든건 짧고 굵게 끝내자는 생각으로 그나마 24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차로 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출발시간은 오후 해가 저물 무렵이므로 낮시간에는 마지막 루앙 프라방 구경에 나섰다.


루앙 프라방의 옛왕궁이자 국립 박물관



어느새 해가 기울고 여행사에서 에약한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앞의 빡우동굴과 꽝시폭포 투어를 예약한 여행사로 일하는 젊은이가 무척 싹싹한데다 최신 승합차 사진을 보여주며 이 버스로 갈 것이니 편안하고 안전하게 갈 수 있다고 장담했었다. 하지만 여행사 승합차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그냥... 루앙 프라방의 시외버스 터미널이었다. 큰 차이는 아니더라도 웃돈을 주고 여행사를 통해 예약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생각하며 헛웃음을 짓고마는 정도지만 당시에는 무척 화가 났었다. 화가 난 이유는 얼마의 돈이 아깝다는 생각보다 라오스 사람에 대한 나 혼자 가졌던 신뢰가 깨졌다는 것이 컸다. 그 동안 만났던 라오스 사람들은 무뚝뚝하긴 해도 가격이나 약속을 어기는 일도 없었고, 인사(싸바이디)와 고마움(꼽짜이)에 대한 표현을 빠뜨리지 않는 속 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그렇다하더라도 모두가 그럴리는 없는거다. 그 친구는 잔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라오스에서는 조금 드문 타입이었을뿐이다. 모두가 친절할리도, 모두가 약삭빠를리도 없다. 어디선가 조금 불쾌한 일을 당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그 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다 바꿀 필요는 없다. 그날 만났던 누군가가 그런 사람일뿐이니까.


하여튼, 라오스 버스를 타고 밤새 달려서 새벽에 태국 국경 건너편에 여행자들을 내려준다. 출국 관리소가 문을 열기 전에 멍한 머리로 까끌한 입속에 다시 활동할 에너지를 채워넣어야 했다.


달디단 연유와 같이 주는 동남아식 커피


푸짐하고 저렴한 샌드위치


버스에서 내린 여행자들이 출입국 사무소가 문을 열 시간을 기다리며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다.


라오스쪽 출입국 사무소


자전거로 동남아를 여행하는 아저씨들이 먼저 강을 건넜다.



강 건너편은 태국 훼이사이


태국 출입국사무소를 통해 입국하고 나면 그 라오스 여행사와 연계된 태국 여행사에서 준비한 뚝뚝이나 썽태우를 타고 어디론가 가게된다.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면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자세히 설명해주지도 않았고 바로 출발하는 줄 알고 있었기에 어디로 가는지 무척 궁금했다. 도착한 곳은 치앙마이로 가는 버스가 준비되기 전에 한두시간 대기할 호텔급 숙소였는데 정원이 무척 잘 꾸며져 있었고, 자연 친화적인 약간은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아마도 이 호텔에서 치앙마이로 가는 사람들과 같이 출발하느라 대기시킨게 아닌가 싶다.

정원에 아직 덜 익은 망고가 탐스럽게 달려있다.



잘 꾸며진 정원 산책길




훼이사이를 출발한 버스는 잘 닦여진 고속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렸다.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를 여행하면서 이렇게 도로 상태가 좋은 길을 달려본 기억이 없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 중에서 태국의 경제 상황이 월등하게 낫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치앙마이로 가는 도중에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여기서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한참을 봐야했는데 알고보니 캐슈넛이라는 견과류였다. 그동안 맥주 안주로 먹어봤음에도 최종으로 만들어진게 아니라 열매 상태의 캐슈넛은 처음이었다. 노랗고 빨간 동그란 버섯모양의 열매 꼭지에 캐슈넛이 달려 있었다. 이 꼭지를 따서 말리고 가공해서 우리가 먹는 캐슈넛이 되는 모양이었다. 호두나 땅콩처럼 열매 안쪽에 딱딱한 껍질에 쌓인 모양을 생각했는데 이렇게 귀여운, 팬시 상품처럼 생겼을 줄은 몰랐다. 이 휴게소 부근은 캐슈넛으로 유명한 곳인지 곳곳에서 캐슈넛을 말리고 있었고 광고판에는 캐슈넛을 선전하고 있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노랗고 빨간 부분은 캐슈애플이라고 하는데 그 부분도 식용으로 사용되는 것 같고, 특이하게도 씨가 열매 안쪽에 있는게 아니라 밖으로 노출된 채 열매 밑으로 자란다고 한다.


오후 시간이 한참 지나서 저녁이 되어갈 무렵에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치앙마이는 수백년 전에 세워진 정사각형 모양의 성곽 내부에 있는 구도심과 그 성곽 외부의 도시로 나뉜다. 버스는 성곽 외부의 게스트하우스들이 밀집된 곳에서 여행자들을 내려줬다. 그런데 근처 게스트하우스에 문의하니 오늘 하루밖에 방이 없다고 한다. 그 먼 길을 달려와 피곤해 죽을 지경인데 다시 내일부터 묵을 방을 찾아야하게 되었다. 스마트폰 앱으로 열심히 방을 찾아서 구도심으로 들어가서 가까스로 방을 구하고 골목길에 있는 식당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피곤해서 입맛이 없을만도 하지만 이 태국 북부지방의 음식들은 내 입맛에 너무 잘 들어맞았다. 저렴한 음식을 갖가지 시켜놓고 먹다보면 어느새 기분도 좋아지고 피로가 풀리는 듯하다. 여행이 즐거우려면 체력도 필요하고 못 본 것에 대한 호기심, 현지인이나 다른 여행자들과 쉽게 친해지는 친밀한 성격도 필요하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가리지 않는 식성이다.


동남아의 푸슬푸슬하고 길쭉한 밥맛이 입맛에 맞지 않는 여행자라 스팀 라이스말고 스티키 라이스를 달라고 하면 위 사진처럼 찹쌀로 지은 밥을 준다. 이 밥은 찰기가 있어 쫄깃하고 씹으면 단맛이 있어 스팀 라이스보다 훨씬 먹기가 편하다.


매콤한 고춧가루가 들어있는 소스에 직화로 구운 바베큐가 정말 맛있었다. 나중에 여러 곳에서 팔고 있는 걸 보니 태국 북부지방의 대표적인 음식인가 싶다. 위의 것은 아니지만 태어나서 최고 맛있었던 바베큐가 치앙마이 시장에서 사먹었던 바베큐였다.


힘든 여정이지만 무사히 동남아에서의 마지막 여행지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루앙 프라방의 구시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왁자지껄한 동남아 여느 관광도시의 밤거리와는 달리 해가 지면 조용하고 새카맣게 어두워진다. 그 어둠이 두려움이나 불안함을 가져오는게 아니라 평화로움과 느긋함이 느껴진다. 밤을 즐기는 여행자라면 루앙 프라방은 심심하고 따분한 곳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어제 루앙 프라방 시내의 사원과 동네 구경을 하고 오늘은 미리 여행사에 예약해둔 빡우동굴과 꽝시폭포 투어를 가기로 했다.

빡우동굴은 루앙 프라방에서 롱테일보트라는 길쭉한 배를 타고 한두시간쯤 가면 나오는데 절벽에 생긴 석회암 동굴에 사람들이 수천개의 불상을 가져다 놓았다. 수천개의 불상이라 어마어마하고 거대한 장관을 기대하면 안된다. 소박하고 불심이 깊은 개개인이 가져다 놓은 가지각색의 조그마한 불상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엄청난 돈과 국민의 혈세를 들여 권력자들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규모의 사원이나 불상보다 이 곳 빡우동굴의 불상들의 모습이 더 부처님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좁고 길쭉한 모양의 롱테일보트


나란히 앉으면 딱 두 명이 앉을 수 있다. 이 보트들도 조금씩 크기가 다른데 사진의 왼쪽 보트는 크기도 더 크고 무엇보다 좌석이 버스에서 떼어 온 듯한 편안한 좌석으로 되어 있다. 기왕이면 저런 배를 타고 싶었으나 내가 탄 배는 그냥 딱딱한 나무걸상이 전부였다.


대부분의 보트는 키잡이가 맨 뒤에 있는데 이 보트는 맨 앞에서 운전하도록 되어 있다. 건기와 우기에 따라 수량의 차이가 많이 나서 강의 암초를 잘 보고 피해야 하기 때문인가 싶다. 내가 루앙프라방을 여행하던 시기는 건기에서 우기로 넘어가는 때여서 그런지 강의 중간중간에 암초나 바위가 많아서 그 곳을 잘 아는 사공이 아니라면 다니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가는 도중에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마침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배 안으로 비가 막 들이친다. 일상생활에서라면 짜증이 났을 일인데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여행중에 비 좀 맞는다고 별로 문제될 게 있을까.


보트를 타고 빡우동굴을 가는 도중에 잠깐 조그만 마을에 내려주는데 이 마을은 여행자들에게 '라오라오'라는 라오스 전통술과 여자들이 베틀로 짠 직물을 팔고 있었다. 직물은 거들떠보지 않고 '라오라오'에 관심을 보이니 조그만 잔에 마셔보라고 준다. 라오라오는 우리나라 전통소주처럼 쌀로 만든 술이고 도수도 40도 정도했다. 맥주도 좋아하지만 여행중 자주 마시다보니 이 독주가 끌려서 조그만 병으로 샀다.





드디어 빡우동굴에 도착했다. 절벽 아랫부분에 갑자기 뻥뚤린 듯한 동굴이 특이하다.





장엄하고 거대한 수천개의 불상을 기대했다면 에게? 싶을 수도 있지만 수백년을 거쳐서 불교 신자들이 하나하나 가져다 놓은 것이니 더 의미는 곳이 아닐까.




여러 대의 보트들이 라오스 불자들과 여행자들을 싣고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한다. 여기서 옆으로 난 사잇길을 돌아가면 동굴 하나가 더 있다. 커다란 나무문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새겨져있었던 듯한데 얼마나 오래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희미한 형태만 남아있다.


빡우동굴에서 돌아온 후에 여행사 사무소에 차려놓은 간단한 점심을 먹고 이번에는 차를 타고 꽝시폭포로 향했다. 꽝시폭포는 현지인들도 많이 찾는 공원인데 입구에서부터 곰 보호소를 지나 산림욕하는 기분으로 걷다보면 옥빛 물이 ㅂ이기 시작한다.




성미 급한 사람들은 벌써 이곳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물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마치 터키의 파묵칼레와 같은 지형이 나온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파묵칼레도 예전에는 이렇게 물이 흘렀을텐데 지금은 수원이 바닥나서 거의 말라버렸다.




꽝시폭포로 오르는 도중, 중간중간에 물놀이를 할만한 곳이 있으면 으레 사람들이 들어차있다. 그 중에는 나무 위에서 줄을 잡고 물로 뛰어내리거나 작은 폭포 위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는 뛰어내리는 즐거움보다 옆에서 보는 즐거움이 더 커져버린 나이인지 선뜻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친구인 듯한 이십대 초반의 우리나라 여행자 3명은 다른 어느 나라 여행자들보다 열심히 그 곳을 즐기고 있었다. 그 사진을 제대로 남겨두지 못한 것이 아쉽다.


꽝시폭포를 보고 나면 다시 차를 타고 라오스 마을에 들른다. 물론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기념품을 팔기 위한 곳이다. 주로 실로 만든 손목에 감는 팔찌를 만들어 파는 곳이었는데 이 기념품들 보다는 아이들 표정이 더 호감이 갔다. 매일 여러차례 여행자들이 왔다 갈테니 심드렁할만도 하지만 아이들은 놀던대로 뛰어놀고 하던대로 즐거운 표정이다. 여행자들 중에 이탈리아에서 여행 온 처자 한 명은 하루종일 다닌 투어로 피곤할텐데 맨발로 아이들과 신나게 공놀이를 하고 놀고 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즐기고 있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멋진 모습이었다.





라오스에서의 일정도 오늘로써 거의 끝났다. 내일 저녁에는 훼이사이를 거쳐 태국 치앙마이까지 24시간이 넘게 걸리는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라오스를 떠나려니 아쉬움이 커졌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더라면 일정에 무리가 있더라도 빡세나 시판돈에도 갔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을 마치고나서 여행중에 받은 느낌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부분이 생각보다 적다는걸 깨달았다. 후각, 청각, 미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이 어우러져 그 곳에서의 느낌이 결정되었다. 가끔 일생생활 중에 여행의 기억이 되살아 날때는 시각보다는 다른 감각에 의해서였다. 가보지 않으면 좋은줄 모른다는 말도, TV나 잡지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돈과 시간을 들여서 여행을 가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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