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피렌체에 머무르던 당시 한낮의 기온은 35도를 넘었다. 여름이면 항상 그랬는지 당시 기온이 특별히 더 높았는지 모르겠지만... 게다가 앞서 말한 숙소는 너무 덥고 시끄러워 낮동안의 피로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원래 여행 패턴은 해가 지면 숙소에 돌아와 쉬면서 여행 정보를 찾아보거나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일로 저녁시간을 보냈었는데 여기서는 도무지 숙소로 돌아가기 싫어 밤 늦은 시간까지 맥도널드(그나마 가장 시원한)에서 시간을 보냈다. 거기서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 비싸더라도 쉴만한 숙소를 찾았고, 이튿날 이탈리아인이 하는 민박집으로 옮겼다.


숙소를 옮기며 오전 반나절을 보내고 나서 점심식사할 곳을 찾던 중에 일본 라멘집을 발견했다. 원래 라멘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탈리아 피자와 파스타에 물리기도 했기 때문에 주저없이 들어갔다.


정통 일본 라멘집은 아니고 이탈리아 음식과 같이 파는 레스토랑인데다 훌륭하진 않지만 미소라멘을 한그릇 먹고나니 한결 기운이 났다.


생각보다 많은 현지인들이 일본 라멘을 먹고 있었다.


공염불 같은 한식의 세계화만을 떠들 것이 아니라 현지에 녹아들어야 진정한 세계화가 될 것이다. 외국에 있는 대부분의 한국식당들은 한국 음식이 그리운 여행자들이나 한국 기업의 주재원,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지 현지인들이 찾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멕시코와 볼리비아 등에 있었던 몇몇 한국 식당을 제외하고는 가격도 현지인들이 먹기에는 다른 음식들보다 지나치게 비쌌다. 


한식의 세계화는 현지 사람들이 먹고 다시 찾을 때 가능한 것이지 정부가 정책적으로 돈을 쓴다거나 외국에서 광고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헐리우드 스타들이 비빔밥을 먹는다고 비빔밥이 세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유명 영화배우가 우리가 모르는 외국 음식을 좋아한다고 그 음식이 대중화되었다고 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우리보다 긴 이민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겠지만 중국이나 일본 음식은 남미의 조그만 도시에서도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레스토랑이 있다.



우피치 미술관에 가기 전에 중세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약초로 약을 만들다가 화장품이 되었다는 수백년된 피렌체의 유명한 화장품 매장을 구경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매장에 있는 많은 손님들의 절반은 한국 사람이었다. 한국 사람을 판매 담당 직원으로 따로 두고 있었으며 카탈로그에도 한국어가 자랑스럽게 쓰여져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두툼한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다. 가격은 아무리 저렴한 것도 3,40유로(당시 환율로는 4.5만원~6만원)를 넘었다. 물론 국내에서 판매하는 화장품보다 품질이 뛰어나니 구매하는 것이겠지만 유럽인들에게도 비싼 화장품 매장에서 절반 정도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우피치 미술관도 당연히 예약을 해야 했고,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었다. (어떤 블로그에서 보니 2014년부터 사진 촬영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피치 미술관의 예술품들은 과연 세계적인 미술관답게 뛰어난 작품들이 정말 많았다. 직접 본 보티첼리의 '봄'과 '비너스의 탄생'은 사진보다 더욱 아름다웠고,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나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작품들도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예술품들이 예전과 같은 감동을 주질 못했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지금은 피렌체 시청사로 사용되는 베키오 궁전으로 향했다.





수제 제작된 듯한 자동차. 기본적으로 클래식한 뼈대에 현대적인 감각을 멋지게 입혔다. 나를 비롯해 지나던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차주인은 뿌듯한 듯이 그 앞에서 지인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오모 성당 옆 골목에 있는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 GROM. 베네치아에도 가게가 있을만큼 유명한 곳이지만 내 입맛에는 어제 맛본 아이스크림에 미치지 못했다.



피렌체에서 꼭 가봐야 할 장소중 하나인 미켈란젤로 언덕도 가지 않고 레스토랑에서 피자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가장 기대했던 피렌체인데 시기가 좋지 않았는지 무덤덤하게 3박 4일을 보냈다. 살다보면 겪게되는 슬럼프가 여행 중에는 이때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터키에서부터 시작되어 2달을 꼬박 채운 유적과 예술품을 보는 여행이 지겨워졌는지도 모르겠다.


여행경로를 바꾸기로 했다. 원래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왼쪽으로 꺾어 프랑스 남부를 통해 스페인으로 가려고 했는데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데다 여름에는 사람들로 북적일 프랑스 남부 해안으로 가는게 끔찍하게 생각되었다. 지중해의 좋은 바다는 터키,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실컷 봤으니 프랑스의 지중해가 그 이상이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나 비싼 비용을 지불할 필요도 없을터였다. 여름 휴가철에 유럽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나마 나을 곳으로 가야겠다 싶었다. 바다는 실컷 봤으니 이제 산을 볼 수 있으면 좋을 곳으로...


이탈리아 북부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지나 독일 남부에서 스위스로... 대충 경로만 정했을 뿐, 정확한 일정도 없고, 교통편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넉달로 접어든 여행 경험으로 가보면 방법이 생기기 마련이라는걸 알고 있다.

좋았던 아시시를 겨우 사흘째 날에 떠난 이유는 '그 곳' 피렌체에 가기 위해서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중심이었던 꽃의 도시 피렌체는 오랫동안 나에게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 1순위였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연인들이 10년 후 만나기로 한 장소였던 두오모 성당의 돔, 보티첼리의 두 걸작 '봄'과 '비너스의 탄생'이 있는 우피치 미술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있는 곳... 피렌체는 나에게 유럽 여행에서 이상향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관광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기 전까지...


여행지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커다란 두 가지는 기차역(혹은 버스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처음 본 도시의 풍경과 첫 날 묵게 되는 숙소다. 아쉽게도 피렌체는 두 가지 모두 좋지 않았다. 기차역 주변은 매우 번잡했고 위협적으로 보이는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이 무척 많았다. 인종차별적인 말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유럽의 대도시들 아테네, 로마, 파리 등등의 기차역 주변이 모두 그렇다. 아테네 여행기에서도 썼었지만 아프리카에서 목숨걸고 지중해를 건너 밀입국한 사람들이 서유럽의 경제난으로 안타깝게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채 길거리를 배회하게 되면서 서유럽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안게된 심각한 사회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6월말 대학생들의 배낭여행 시즌이 시작되어서 인기 유럽배낭여행 코스인 피렌체의 저렴한 숙소나 민박집은 오래전 예약이 끝나버렸다. 수차례 연락후, 어렵게 잡은 민박집은 일년 간의 여행 중에 탑 5안에 드는 안좋은 숙소였다.


피렌체의 빨래방.

빨래는 빨래방이나 숙소에 있는 세탁기에 동전을 이용해서 해야 하는데 

세탁기와 건조기를 한번씩 돌리는데 동남아에서 하룻동안 쓸 수 있는 여행경비가 든다.

유럽의 비싼 물가가 새삼 와닿는다.


나에게 좋지 않은 숙소의 기준은 세가지다. 더럽고 불결한 숙소(혹은 베드벅이 나오거나)거나, 주인장이 여행자들을 손님으로 대하지 않고 불쌍하고 가난한 여행자에게 선심을 쓰듯 대하는 숙소(유럽의 몇몇 민박이 그랬다), 마지막으로 주인이든, 매니저든 여행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숙소인데 피렌체에서 잡은 민박집이 마지막의 경우였다.


숙소에 도착하니 맨 먼저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들려주고, 못지킬거면 나가던지... 하는 분위기라 일단 기분이 나빴다. 모든 숙소에는 여행자들이 지켜야 할 사항들이 있고, 어떤 곳은 그 사항들을 프린트 해놓거나 여기저기 붙여 놓기도 한다. 하지만 '싫으면 나가던지' 하는 분위기를 발산하는 곳은 처음이었다. 성수기니 니가 안묵어도 상관없다는 것이었을게다.


이 곳은 문제도 많았는데 매니저들이 손님이 들어가든, 나가든, 처음보든 아는체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방을 쓰는데도 쳐다보지 않았다. 게다가 방은 너무도 더웠다. 35도가 넘는 더위에 선풍기조차 없었고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밤새 차소리로 잠을 자기 힘들었다. 이런 환경에 무뎌질대로 무뎌진 나조차도 그랬다. 정해진 시간이 넘어서 들어오는 여행자가 아래층 벨을 누르면 맨 앞방에서 묵게되는 손님(이번엔 나였다)이 문을 열어줘야했다.


먼 한국에서 큰 돈을 들여 난생처음 배낭여행을 시작하는 어린 학생들을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는 듯해서 너무 불쾌했다.(대부분의 숙박객이 방학을 맞아 나온 대학생들이니)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업에는 어느 정도 책임감이나 사명감도 필요하다. 더구나 먼 외국에서 민박집에 묵는 경우는 여행에 익숙치않아 같은 한국인들끼리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주인은 한국 여행자들에게 현지에서의 도움을 주고 여행자들은 이런 도움에 대한 댓가까지 포함하여 숙박료를 지불하는 것이다.


어쨌든 불쾌하지만 길거리에서 잘 수는 없으니 일단 여기서 머물기로 했다. 그리고 숙소에서 망친 기분을 전환 할 겸, 피렌체의 유명한 음식, 티본 스테이크를 맛보러 나섰다.


여행중에 가장 신뢰하게 된 여행정보 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의 추천 레스토랑이었음에 티본스테이크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내 입맛의 문제일 수도 있고, 방문한 레스토랑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기대에 비해서 많이 모자랐다.



르네상스 시대의 수많은 건축물과 예술품으로 들어찬 이 도시에서도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두오모 성당(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꽃의 성모 마리아)이다. 이튿날 아침 이 유명한 두오모 성당에서부터 피렌체에서의 일정을 시작했다. 흰색과 녹색의 대리석의 기묘한 외형만으로도 여지껏 다른 곳에서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더구나 브루넬레스키가 건축한 두오모 성당의 돔은 건축가로서 그의 천재적인 역량이 발휘된, 당시 건축 기술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거대한 규모이다. 후에 미켈란젤로가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돔을 완성하기까지 가장 큰 돔이었다고 한다.


이 돔은 밖에서 보기에는 그다지 크지 않아보이지만 돔 꼭대기에 가기 위해 성당 내부에서 돔 가까이 올라가면 그 큰 규모를 실감하게 된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최후의심판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이자 건축가인 조토가 건축한 '조토의 종탑'


조토의 종탑과 두오모의 돔은 높이가 비슷한데 종탑에서는 돔을, 돔에서는 종탑을 볼 수 있으나 둘 다 유료이기 때문에 돔을 선택했다.



두오모의 돔에 오르자 지붕이 온통 붉은 벽돌색인 피렌체 시내의 전경과 멀리 토스카나 지방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계단 반대쪽에 앉아서 한참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덥고 수많은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저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높이가 85m라는 조토의 종탑과 높이가 거의 비슷하다. 아래로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작게 보인다.


두오모 성당의 최후의 심판

아래에서 볼 때는 크기가 와닿지 않지만 돔에 올라가며 바로 앞에서 보면 그 크기가 정말 거대하다.


점심으로 먹은 피자. 토핑이 거의 없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피자지만 신선한 토마토소스와 치즈로 맛이 훌륭했다.


두오모 성당의 박물관이었을까...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피렌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인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 상이다. 귀신들린 여자였으나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고 그를 따르게 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는 광야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살았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상이다.


아름답고 고귀하게 그려지는 마리아(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닌 헐벗고 굶주렸으며 육신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막달라 마리아의 상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수백년 전 르네상스 초기 작품이지만 마치 현대 미술가가 고통스럽지만 아직 잃지않은 삶의 의지를 표현한 듯한 느낌이 든다.




피렌체의 유명한 음식은 어제 저녁에 먹은 티본 스테이크와 아이스크림(정확하게는 샤베트에 가깝다)이다. 이 아이스크림은 피렌체의 유명한 메디치 가문이 주최한 요리 경연대회에 출전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로마에서도 유명한 아이스크림을 먹어봤고, 피렌체나 세계 곳곳에서 유명하다는 다른 아이스크림을 먹어봤지만 나에겐 이 곳이 내가 먹어 본 최고의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특히나 피스타치오를 알갱이채 넣은 것이 아니라 세밀하게 갈아서 섞은 연두색의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은 환상적이었다.




오늘 피렌체 일정의 마무리는 아르노 강에 세워진 베키오 다리였다. 많은 소설과 영화에 등장한 이 다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갔으나 지금은 단지 고가의 보석과 금세공품점들이 늘어선 쇼핑장소일뿐이었다.




해지는 쪽에 다른 다리가 있었는데 거기는 사람들도 많지 않고 오히려 베키오 다리가 더 잘 보일 것 같았다.


역시 훌륭한 선택이었다. 베키오 다리에서 보는 것보다 다른 쪽에서 보는 것이 훨씬 훌륭했다. 더구나 지는 태양빛을 받아 베키오 다리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아르노 강으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다리 위로는 퇴근하는 직장인들과 파티에라도 가는 듯 잘 차려입은 이탈리아의 멋쟁이들이 쉴새없이 지나다녔다. 불과 얼마전에 나도 저들처럼 바쁘게 출퇴근하는 직장인이었는데 이제는 마치 딴 세상 사람인냥 그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새로웠다. 


지금은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왔지만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자신을 볼 수 있었던 시간들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된다. 경력의 단절을 일순간이지만 인생은 길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녀온 후, 사람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들은 말은 '어디가 제일 좋았어?' 였다. 이것처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또 있을까? '당신은 먹어 본 음식중에 어디서 먹은 무슨 메뉴가 가장 맛있었습니까?'라는 질문과 마찬가지다. 어떤 날은 스테이크가 먹고 싶더라도 어떤 날은 청국장이 먹고 싶기도 하다. 게다가 같은 음식이라 하더라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여행지도 마찬가지라서 어떤 날은 모든 것을 녹여버릴듯 강렬하게 내리쬐던 스페인의 태양이 생각날 때가 있고, 어떤 날은 맹렬한 칼바람에 온몸을 비틀거리며 트래킹했던 파타고니아가 사무치게 그리워지기도 한다. 많은 곳들 중에서 싫었던 곳은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제일 좋았던 곳을 딱 집어 이야기하긴 어렵다. 그렇다하더라도 이번에 이탈리아에서 머문 3주동안,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아시시가 제일 마음에 남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나폴리에서 기차를 타고 로마에 가서 거기서 아시시행 기차로 갈아탔다. 아시시는 작은 도시기 때문에 기차가 많지 않으므로 시간을 잘 맞춰야하는데 유럽은 각 나라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서 예약할 수 있는 시스템이 무척 잘 갖춰져 있어서 편리했다.(게다가 결제하기 위해 액티브엑스를 설치하거나 자질구레한 확인 사항들이 없어 무척 편리하다.)


하지만, 나폴리에서 아시시로 가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버스다. 기차 예매를 마치고 나서 민박집 아주머니께 말씀드렸더니 버스가 있다고 하셨다. 여행자에게는 주위 사람들 특히, 숙소 주인장께 이것저것 물어보고 정보를 얻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걸 다시 느끼게 되었다.


아시시의 아침은 수백마리의 새들과 함께 맞는다. 제비처럼 생긴 수많은 새들이 벌레를 잡기 위해 활강한다. 

위 사진에 찍힌 검은 먼지처럼 보이는 것들이 그 새들이다.


산타 키아라 대성당 앞 광장에서 바라 본 풍경


아시시는 완만한 구릉 위에 형성된 작은 도시이다. 중세에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도시들이 높은 곳에 있고, 맨 위에는 그 지역의 지배자가 사는 성이 위치해 있는데 아시시도 전형적으로 이런 모습이다. 어제 오후 느지막하게 도착했을 때는 어스름한데다 사람들도 다니지 않아서 정말 중세 도시에 와 있는 느낌이었는데 다음날 아침 화창한 햇살 아래에서 보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다.


마침 숙소가 산타 키아라 성당 앞 광장에 위치해 있었다. 싼 방이라 방에서 경치가 내다보이진 않았지만 숙소 밖으로 나오면 언제든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산타 키아라 대성당 앞 광장의 분수대


아침부터 아이들이 분수대에서 물장난을 시작할만큼 햇살이 강하다.


산타 클라라 대성당 앞 광장


산타 키아라 대성당


아시시는 잘 알려진 것처럼 프란체스코 성인이 프란체스코회를 설립한 곳이지만 이 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수도사나 수녀들 중에 교황으로부터 인정 받은 성인이 여러 명 있다. 13세기 초 키아라 수도회를 만든 키아라(클라라) 성인도 그 중에 한 명이다. 키아라 수녀 사후에 성인으로 시성되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아시시는 중세 도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느낌이다. 로도스가 전쟁터 한 가운데 있었던 중세 도시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아시시는 훨씬 현대적으로 다듬어진 느낌이다. 집마다 창가에 꽃이 핀 화분들을늘어놓았고 가로등도 중세풍이지만 최근의 것인듯했으며 길도 평탄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골목골목을 다니며 구경하는 것으로 아시시에서의 일정을 시작했다.





이름을 잊어버린 성당의 정문. 사자가 사람을 누르고 머리를 무는 형상의 조각이 있다.

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이런 벌을 받을 것이라 협박하는 용도였을 듯하다.



나이 들어보이는 부모와 어린 아들들(부모가 아니라 조부모일지도...)

유럽에서는 나이든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여행하는 모습이 굉장히 흔하게 보였다.



오래된 건물의 벽에는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쇠로 만든 구조물이 굉장히 많이 박혀 있었다.

정확한 것은 모르겠지만 건물벽이 갈라지거나 훼손되는 것을 막는 용도인 것 같다.



이리저리 골목을 돌아 코무네 광장으로 나왔더니 중세 도시와 어울리지 않게 최신형 오토바이 수십대가 서 있었다. 오토바이가 모두 유명한 이탈리아 브랜드인 두카티였다. 두카티 동호회라도 하는듯. 그 중에는 멋진 라이더 복장을 한 여성 라이더들도 여럿 보였다.




오전임에도 날이 무척 더워서 코무네 광장에 있는 까페에서 쉬기로 했다. 카페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서 '아메리카노' 특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흔치않은 메뉴다. 유럽에서는 대부분 에스프레소나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탄 라떼 종류를 마시고 물을 탄 아메리카노는 메뉴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도 커피 문화가 발달한 곳이며, 세계에서 처음 생긴 카페가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카페일 정도로 카페도 굉장히 많다. 게다가 대부분의 물가는 비쌌지만 커피 값은 무척 싸서 에스프레소나 카페라떼는 1~1.5유로면 마실 수 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화장실이 급하다면 돈내고 공공 화장실을 사용하지 말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카페의 화장실을 이용하라는 여행팁까지 있을 정도다.


커피는 당연히 따뜻하게 마시는 음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커피에 얼음을 넣은 메뉴도 없다. '아이스...'로 시작하는 메뉴 자체가 없었다. 더운 날씨라 시원한 것을 마시고 싶어서 궁색하게도 '시원한 커피'가 있냐고 했더니 나온게 사진의 커피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커피향도 진하고 무척 맛있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스페인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볼 수 있었던 스타벅스를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남미의 유명한 예술가 보테로의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관심이 있었지만 관람료가 꽤 비싸서 포기했다.


산 프란치스코 대성당


12세기 말 아시시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 성인은 로마 카톨릭에 귀의하여 청빈, 소박을 강조하는 프란치스코회를 세웠다고 한다.  산 프란치스코 성당은 성인의 사후에 지어졌으며 그의 유해가 안치된 곳으로 많은 유물을 보관하고 있으나 실제 성인이 가르침을 전한 곳은 아니다. 성인이 아시시에 처음 세운 교회는 구릉 아래 아시시 역 근처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데글리 안젤리 성당에 있다. 얼마나 청빈함을 강조했는지 이 작은 교회는 안젤리 성당 본당 내부에 있다. 교회내에 교회가 있는 것이다. 아시시를 떠나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며 사전 정보없이 방문했던 성당에서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산 프란치스코 성당은 성인에 대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성당내에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원도 있었다. 내부는 사진을 못찍게 되어 있는지 찍은 사진이 없다.


산 프란치스코 성당의 입구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다. 성당을 나오면 그 유명한(산 프란치스코 성당 사진에 항상 포함되는) 아름다운 회랑이 나온다.


산 프란치스코 성당의 회랑


스페인에는 돼지 뒷다리를 말린 후, 아주 얇게 잘라서 과일이나 빵에 얹어 먹는 하몽이라는 음식이 있다. 베이컨과 비슷하지만 훨씬 얇고 덜 짜다. 나같이 모르는 사람은 그게 그것인 것 같은데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이탈리아에도 비슷한(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음식이 있는데 아시시에도 이 지방에서 만든 치즈와 햄 같은 훈제 음식들을 파는 커다란 가게가 있었다. 위 사진에서 벽에 걸린 것들이 돼지 뒷다리이고, 잘린 단면에 붉게 박힌 것들은 후추열매다. 나중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지만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문화적으로 매우 유사한 점이 많으며, 언어도 비슷한 단어들이 많았다.





아시시의 기념품점에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을 모델로 한 캐릭터 상품들이 대단히 많다. 하지만 청빈, 검소함을 강조한 단체의 수도사라고 해서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게 아니다. 차림새는 프란치스코 수도사의 복장 그대로 거친 천을 둘러쓰고 허리띠만 졸라맸지만 익살맞고 유머러스한 표정의 캐릭터들이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하나하나 구경하는게 무척이나 재미나다.


이 날 느지막하게 점심을 먹고 마지막으로 한 것은 아시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해지는 광경을 본 것이다. 지금은 거의 찾는 사람도 없고 완벽히 복원된 것도 아니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시시에도 가장 높은 곳에는 옛 성이 있다. 



성으로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 본 아시시의 전경





성채는 꽤 컸지만 완벽하게 복원되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찾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다 도착한 시간이 오후 느지막해서 성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사실 성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다.

밀밭, 포도밭, 올리브밭...


성벽이 무너진 자리, 밤에 성을 비추는 조명이 설치된 구조물 위에 이집트에서 모래바람을 피하기 위해 산 보자기 같은 헝겊을 펴고 앉았다. 처음 도착했을 때 몇 명 있던 사람들도 어느새 내려가고 없었다. 주위는 고요하고 가끔 새소리만들렸다. (아시시에는 새들이 무척 많다. 아침에는 벌레를 잡기 위해 나르는 수백마리의 새들을 볼 수 있다.)






한참 아시시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으니 해가 지고 있었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는 도시에서 유적이나 예술품들을 보고, 도시를 구경하는걸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여행을 마치고 나니 내가 좋아했던 것은 자연에서 느끼는 고요함, 평화로움, 장엄함이었다. 40년 동안 모르고 살았던 나를 여행을 통해 만나게 된다. 여행은 그런 것인가보다.


물론 중세 도시의 아시시, 프란치스코회의 종교 도시 아시시의 모습도 포함되지만, 내가 아시시를 이탈리아에서 가장 좋아하게 된 첫번째 이유는 성채에서 내려다 본 아시시의 풍경과 해질녘의 고즈넉함이 좋았기 때문이다.

호주의 시드니, 브라질의 히우 지 자네이루와 함께 세계 3대이라는 나폴리는 분명히 아름다운 항구이기는 하지만, 신도시로 깨끗하고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시드니나 아름다운 해변과 브라질의 색다른 문화를 보여주는 히우 지 자네이루에 비해서 분명히 예전의 명성이 많이 퇴색한 것이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이탈리아 내에서 북부에 비해 빈곤한 남부 이탈리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거리를 배회하는 아프리카계 불법 이민자들의 수도 많고, 도로나 건물들의 보수도 잘 되지 않고 있다.


나폴리 시내는 예전에 한번 왔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일정상 이번에는 생략하고, 오전에는 어제 갔었던 폼페이의 유적이 전시된 고고학 박물관을 둘러 본 뒤에 오후에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이며, 성 프란체스코의 도시인 아시시로 출발하기로 했다.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의 주요 전시품들은 폼페이에서 발굴된 조각상들과 모자이크화들이다.

어린 바쿠스의 조각상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헤라클레스의 조각상


넵튠의 조각상


천정의 벽화는 폼페이 저택에 있던 벽화를 옮겨온 듯하다.


지구를 짊어지는 벌을 받은 거인 아틀라스의 조각상


폼페이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로마신화의 신들만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 사진의 어류들은 나폴리 근해에서 많이 잡히는 어류들을 아주 작은 색깔있는 돌로 표현한 모자이크화이다. 너무 세밀해서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모자이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제 폼페이 유적에서 본 알렉산더 대왕과 다리우스 왕의 전투 모자이크화


이런 유명한 유물들 외에 가장 관람객들의 시선을 끄는 유물들은 당시의 성풍속을 알 수 있는 갖가지 조각, 토기들이다. 고대 로마사람들, 특히 고급 휴양지였던 폼페이는 성에 대해 꽤나 개방적이었나보다. 너무 적나라하고 실제적인 표현들이 많기 때문에 나이 제한이 없는 이 블로그에 올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서 생략한다. 하지만 성인 관람객이라면 즐겁게 보고 웃을만한 것들이며 실제 가장 관람객들의 밀도가 높은 곳이 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방이다.


박물관을 나와서 나폴리에서 유명하다는, 민박집 주인께서 알려주신 피자집을 찾아 걸었다. 건물사이의 좁은 골목골목을 지나(얼마나 좁은지 스마트폰의 GPS가 건물안에 들어온 듯이 잡히지 않는다) 겨우 찾아간 피자집은 휴일이었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시간과 요일 개념이 희미해진다. 회사에 다닐때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짜여진 업무로 요일 개념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는데 여행을 다니다보면 요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가끔 요일에 대한 인식이 필요할 때가 이렇게 어떤 곳을 찾아갔을 때인데 일요일이라거나 휴일이라 문을 닫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결국, 나폴리의 유명한 피자는 맛보지 못하고 근처에서 크림과 달걀 노른자와 베이컨으로 짭짤하게 조리된 까르보나라를 맛보고 왔다.(이탈리아의 파스타들, 특히 까르보나라는 엄청 짜다. 한국 사람들 입맛에 맞기 어려울만큼. 게다가 크림보다는 달걀 노른자를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맛보던 까르보나라와는 많이 다르다.)


남부 이탈리아 여행을 마쳤다. 시칠리아를 가지 못한 것, 카프리의 푸른 동굴을 보지 못한 것, 포지타노에서 머물지 못한 것들이 아쉽긴 했지만 어떤 여행도 100%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7,80년을 살아가는 인생에서도 아쉬움은 남는데 인생에 비해 극히 짧은 시간인 여행에서 모든 것을 만족시키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없지만 여행은 다시 올 수 있지않은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은 처음이다. 떠나는 아쉬움보다 아시시에 대한 기대가 훨씬 더 컸다.

소렌토에서 나폴리로 돌아와 먼저 묵었던 '소나무 민박'에서 다시 묵었다. 다시 올지 몰랐다며 반갑게 맞아주시는 아저씨와 그 날 저녁 메뉴가 먼저 왔을 때와 같아서 어떡하냐며 걱정하시는 아주머니 덕분에 이 민박이 더 아늑하고 정겨워졌다.


유럽을 여행하면서는 비싼 물가 때문에 여러 곳에서 한국인 민박집에 묵었지만 시설이 조금 낡았더라도 여행자들 위주로 운영하면서 그들을 신경써주시는 분들이 있는가하면, 어차피 며칠 머물렀다 떠날 여행자들이니 운영 편의 위주로 운영하시는 분들이 있다. 나에게는 여행하면서 마음 편한 곳이 최고의 숙소였다. 민박집 중에서는 이 소나무 민박도 참 좋은 곳이었다는 생각이다.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는 저렴하게 운영하는 숙소이기 때문에 몇 가지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부엌을 이용할 때는 다음 사람을 위해서 설겆이나 뒷정리는 빠른 시간내에 말끔하게 해두는게 원칙이고, 늦은 시간에 샤워를 하거나 떠들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물론 가끔은 같이 묵는 사람들끼리 늦게까지 이야기 꽃을 피우거나 술자리를 갖기도 한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거나 밤 늦게 도착할때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가능한 조심히 행동해야 한다.


가끔 이런 공동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는 여행자들 중에 타인을 불편하게 하고 숙소 주인장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여행자들 때문이겠지만 그래서인지 지나치게 숙소에서 여행자들의 행동을 제한하고 숙소 관리에만 신경을 쓰는 주인들도 많다.


지나친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배려없는 여행자와 여행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주인장이 둘다 많은 곳이 유럽이다. 여행자의 대부분이 배낭여행자인 남미인 경우에는 주인과 여행자 사이에, 여행자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지켜야 할 예절이 흐트러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많은 반론이 있겠지만 짧지만 내 개인적인 경험상 그랬다는 것이다.


여튼, 나폴리 소나무 민박에 머무르며 이튿날 폼페이 유적지를 방문했다. 나폴리에서 전철(우리나라의 국철쯤)을 타면 폼페이 유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입구는 크지 않았지만 표를 사고 들어간 폼페이 유적은 정말 방대하게 넓었다. 유적지의 특징이지만 이 곳도 그늘이 거의 없는데다 섭씨 35도는 가뿐하게 넘어가는 이탈리아의 여름은 무척이나 덥기 때문에 챙 넓은 모자와 썬크림은 필수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화산재에 묻혀버린 당시 최고의 휴양도시이자 거대 도시였던 폼페이는 1500년간 인류의 기억속에 사라져 있었다가 1500년대 수로 공사중에 일부가 발견되어 지금까지 발굴, 복원중이라고 한다. 아직도   3분의 1은 발굴되지 않은 상태라고 하니 이 도시를 뒤덮은 화산폭발이 얼마나 거대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워낙 덥고 햇볕이 강하기 때문에 가지고 온 물은 금방 동나버린다. 유적도 넓어서 음료수를 살 곳이 마땅치 않으므로 간혹 있는 공공 수도(이것도 유적의 일부이지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물을 받으려고 대기한다.



이런 나무그늘을 만나면 휴식은 필수다. 언제 이런 그늘을 만날지 알 수 없으므로 쉴 수 있을 때 쉬어줘야한다. 그늘에서 팔자 좋게 늘어진 고양이를 만난다면 아무리 사진을 찍고 간지럽히고 놀자고 졸라도 눈길 한번 받기 어렵다.



로마 유적에서 빠지지 않는 대극장. 손실된 부분이 많아서인지 대부분은 새로 복구된 듯 보인다.


 로마인들의 길 닦는 솜씨는 원래 알아주는 것이지만 폼페이의 길과 하수도는 지금 사용해도 거뜬할 정도로 훌륭하다.


제법 거대한 크기의 원형경기장





목욕을 좋아했던 로마인들이라 목욕탕 유적이 여러 곳에 있다.



목욕탕 유적 앞에는 으례 이런 유적이 있는데 이 곳은 목욕을 끝낸 로마인들이 음료를 마시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목욕을 끝낸 후 요쿠르트나 바나나 우유를 마셨듯이.



화산폭발 당시 화산재에 묻히며 미이라화 되어버린 사람들.

줄에 묶인 개, 아이를 품에 앉은 여성 등... 보기만 해도 고통이 느껴진다.


폼페이는 휴양도시여서 로마 귀족들의 훌륭한 저택들이 많았는데 

어느 저택 앞에는 개를 조심하라는 내용을 저택 입구에 모자이크로 만들어 놓을만큼 호사스러웠다.


'알렉산더 대왕과 다리우스 왕의 전투' 모자이크. 원본은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폼페이에서 발굴된 유적중 유명한 '춤추는 판의 동상'. 원본은 역시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중요 유물들은 대부분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박물관에서 유물들이 주는 느낌과 실제 유적에서 받는 느낌은 차이가 많이 난다. 고대 로마의 생활상을 박물관이 아니라 유적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나폴리를 여행할 때 하루쯤 꼭 들러야 할 곳이다. 반면 역사나 유적에 관심없는 사람이라면 정말 지루하고 따분할 곳이니 반드시 건너뛰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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