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에 생긴 물집이 많이 좋아진 덕분에 조금은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사실 상태가 좋아졌다기보다는 더 심해지지 않지만 꾸준한 통증에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며칠만에 걸으면서 사진을 찍을만큼은...


아직 캄캄한 새벽에 부르고스 대성당을 지났다. 지나고나서 생각하니 화려한 외관을 가진 역사적인 건물임에도 들어가보지 못한게 조금 아쉽다. 그 당시에는 목적지까지 걷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아직 추수가 끝나지 않은 밀밭이 펼쳐졌다. 스페인 북부는 산이 적고 산이라고 해도 높지 않아서 이 완만한 구릉을 거의 꼭대기까지 깎아서 밀을 경작하고 있었다. 숨막히는 무더운 날씨에 언덕위에서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밀밭을 바라보면 마치 사막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밀밭과 함께 인상적이었던 수많은 해바라기들...







아홉번째날은 하루종일 밑밭과 해바라기밭 사이를 걸었다. 풍경의 변화가 적어서 지루한 길이라는 평도 있지만 난 이 밀밭과 해바라기밭이 좋았다. 시기가 달라서 들판에 밀도 해바라기도 없는 길을 걸었다면 나도 지루한 길이라는 평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드디어, 열번째 날이다. 처음 과도한 의욕이 불타올랐을 때는 2주를 꼬박 채워서 레온까지 걸을 생각도  했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거리가 남아 있었고, 순례길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스페인 여행을 하기 전에 며칠 쉬는게 좋겠다 싶어서 오늘까지 걷는 것으로 순례길 맛보기는 끝내기로 했다.


순례길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걷기 위해서는 등산용 폴을 준비하거나 적어도 길에서 파는 순례자용 지팡이라도 사는게 좋다. 나는 이후 여행에서 짐이 될 것이기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지팡이가 있으면 무릎이나 발목에 훨씬 부담이 덜 간다.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불었던 언덕에 올랐다. 마치 장거리 달리기의 골인지점처럼 사람들이 헉헉거리며 올라와서는 정상에서 주저앉아서 쉰다. 꼭대기에는 순례자들이 남긴 메모들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게시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길을 걷고 있지만 한 명도 걷게 된 것을 후회한다는 메모는 없었다. 하긴, 후회하는 사람이라면 메모를 남길 이유도 없을테지만.


열흘간 걸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며칠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인사를 하게된 70세가 다된 프랑스인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프랑스 남부의 자기 집에서부터 걷고 있다고 했다. 이미 한달이 넘게 걷고 있었고, 아직도 3,4주는 걸어야 한다며 걷게 될 거리는 모두 천 삼사백 킬로미터는 될거라고 했다. 프랑스 남부에서 걱정 없이 살았을 것 같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젊은이들도 끝까지 걷기 힘든 이 길을 고통스러워하며 걷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도 저 나이가 되었을 때도 두려움 없이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할 용기가 남아있길 바랬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밀밭이 마치 사막처럼 보였다.




잠시 쉬어갈 나무그늘도 없는 평평한 들판이 오히려 순례자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길이다. 이 들판이 끝나고 마을이 나오는 지점에 마을 할아버지들이 음료수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나눠주고 있었다.



고작 열흘동안 2백여 킬로미터를 걸었을뿐이지만 멋진 풍경과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무척 친절하고 낙천적이었으며, 순례자들끼리는 항상 돕고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걱정하고 자신의 것을 나눠주었다.(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올라'와 '부엔 까미노'라는 인사를 저절로 배우게 되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힘들어서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인사를 할 때는 저절로 미소를 띄게 된다. 처음보는 사람과도 단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종과 국적을 초월해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다.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그 길 위에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트래킹 길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나는 그 길을 모두 걷지 못했고, 그 모습을 다 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것도, 본 것도 일부분일뿐이기에 남은 길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이 길에 무엇이 있었길래, 무엇을 보고 깨달았길래 어떤 사람들은 수차례 다녀오기도 한다. 등반가들이 산을 떠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도 그 열흘간의 기억이 떠오르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생겨난다. 불행하게도 언젠가 다시 그 길을 걷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 그 욕구를 참으면 살아야 할 것이다.

여섯 번째 날도 사진이 없다. 그냥 넘어가도 상관없을 날을 블로그에 기록하는 것은 고마운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발바닥은 덴듯이 화끈거리고 아팠다. 매시간마다 앉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양말을 벗고 상태를 확인했다. 진물이 흐르다 굳고, 다시 흐르다 굳었다. 발바닥에서 올라온 열은 몸까지 데우는 듯 했지만 이것도 살면서 마주치는 흔한 고통의 한가지일 뿐이다 생각하고 미련스럽게 걸었다. 하지만 그 날 걷기로 마음 먹었던 마을까지 오자 마음이 놓여서인지 몸도 말을 듣지 않았다.


어디에 더 좋은 알베르게가 있는지 찾을 기력도 없어서 마을 입구에 있는 저렴하지만 무척 오래된 알베르게를 찾아들어갔다. 입구에서 이미 비용을 지불하고 이층 침대를 배정 받았지만 거기는 지금까지 내가 머물렀던 알베르게와는 분위기나 시설이 너무나 달랐다. 지금까지 묵었던 알베르게가 순수히 걷는 목적을 가진 순례자들이라면 이 곳은 젊음을 불사르기 위해 여행하는 젊은 철부지 서양여행자들의 싸구려 게스트하우스 같았다.


정오가 지나지 않았으니 분명 오늘 길을 걸은 순례자가 아닐 젊은이들이 속옷만 입은채 늦은 잠에 빠져 있었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마주치는 순례자들끼리의 배려나 흔한 인사마저도 없었다. 몸이 괜찮았다면 참았겠지만 힘이 드니 여기서는 휴식이 힘들겠다 싶어서 이미 지불한 숙박비 몇 유로를 포기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머리를 아주 짧게 깎은 한국인을 만났다. 혼자 수개월째 유럽 여행중이라는 이 친구와 몇 마디 말을 나누고나서, 나는 돈이 좀 들더라도 편하게 쉬기 위해 바로 앞 저렴해 보이는 호텔로 가겠다고 했고 이 청년은 쓸만한 알베르게를 찾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분명 좋은 알베르게가 있을테지만 도무지 찾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1인실이 거금 40유로였지만 생각할 틈이 없었다.


호텔에서 화끈거리는 발바닥을 물수건으로 찜질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방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받아보니 호텔 앞에서 헤어졌던 그 친구가 리셉션에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자기가 묵는 알베르게에서 순례중인 의사가 순례자들의 물집을 치료해주고 도네이션을 받고 있으니 안내하겠다는 것이다.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가보니(알베르게 시설이나 분위기가 먼저 갔었던 곳과는 하늘과 땅차이였다) 라틴계 젊은이가 사람들을 봐주고 있었다. 사실 의사라고 물집 치료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바늘로 두꺼운 발바닥 피부를 갈라 진물을 뺀 다음, 그 안으로 약을 흘려 넣었다. 그리고 붕대와 반창고로 꼼꼼하게 싸매주었다.


훨씬 움직이기도 편하고 통증도 덜 느껴졌다. 치료비는 도네이션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전이나 소액 지폐를 통에 넣는데 너무 고마운 나머지 가지고 있던 동전을 모두 넣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루종일 걸어서 피곤할텐데 내 상태를 걱정해 리셉션까지 찾아와 전화해 준 그 청년이 고마워 저녁을 샀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데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일주일 내내 저녁을 사줘도 모자랄만큼 큰 도움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예닐곱살 어렸던 그 친구는 회사를 다니다 그만 두고 유럽에 왔다고 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반드시 유럽이었던 이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유는 그 친구의 개인사정이라 쓸 수는 없지만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할 수록 참 착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나눈 연락처에는 아직도 그 친구의 카카오톡이 등록되어 있다. 카톡을 쓸 때 간혹 그 친구의 프로필 사진이 보이면 잘 지내고 있구나... 라고만 생각하고 그 뒤로 결국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런 도움을 준 사람과 끈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나는 참 정이 없는 사람인가보다.


아래는 치료를 받은지 며칠 뒤 알베르게에서 찍은 사진인데 얼마나 꼼꼼하게 붕대를 붙여줬는지 며칠 동안 걸었어도 떨어짐이 없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여덟번째날, 부르고스에 도착했다. 며칠째 꺼내지도 않았던 카메라에 무슨 일로 손이 갔는지 이 날은 몇 장의 사진이 남아있다.


부르고스 구시내로 들어가는 성문에서 만난 거리의 악사들


부르고스는 옛날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이며, 11세기 이슬람 세력과 싸운 전설적인 영웅 엘 시드의 출생지라고 한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부르고뉴의 알베르게도 시설이 무척 좋았고 운영하는 사람들도 친절했다. 지친 몸을 몇 시간 뉘이고 저녁을 먹으러 나오니 그동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끌어오르던 대지가 식으면서 공기중에 사우나처럼 뜨겁고 습한 기운이 가득 했지만 내 몸은 오히려 기운을 차리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맞는 비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짧은 순례길 맛보기도 슬슬 종반부로 넘어가고 있었다.


새벽, 순례길을 걷다가 전날 묵었던 곳이 한눈에 보일 정도쯤해서 뒤돌아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아직 어두침침하고 사방이 고요한 이른 시간에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이유가 뭔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가끔은 무척 외로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일상을 살아오면서 마찬가지다. 추운 겨울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회사 가는 길에 문득 이런 삶이 의미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주위에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이 있어도 외로울 때가 있다. 일상에서는 어쩌다 짧은 순간 느끼는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들을 여행중에서는 훨씬 자주, 그리고 길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여행은 인생의 농밀한 집약과 같다는 말들을 하나보다.


한달을 넘게 걷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얼마되지 않지만 걸었던 날의 수가 늘어나고 지나온 길이 길어지면서 주위의 경치를 살피는 횟수는 줄어들고 생각에 잠기는 시간은 더 길어졌다. 게다가 매일 조금씩 쌓이는 몸의 피로는 다른 활동들을 모두 불필요한 것으로 단정하게 만들고 온몸의 에너지를 오로지 걷는데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걷고, 어디서 잠을 자고, 어떻게 끼니를 해결해야 할지만 고민하다보니 여행중 단순했던 생활이 여기서는 더욱 단순해졌다. 그리고, 내가 여행 전에 불필요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불필요한 것들을 갖기 위한 노력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물론, 여행을 끝낸 지금도 회사에 다니며 받는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으로 월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목적이나 의미가 여행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은 분명하다.



아침에 해가 뜨는걸 보면 항상 힘이 나는 기분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태양이 햇볕이 퍼붓기 시작하면 힘은 커녕 절로 욕이 나온다.


순례자의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어주시는 할머니


출발한지 세시간쯤 되었을 때 팜플로나에서 출발한 후, 처음으로 대도시라 할 수 있는 '로그로뇨'에 도착했다. 로그로뇨에서는 아침식사를 위해 잠시 멈추고 다시 떠났기 때문에 별다른 느낌은 없지만 도착한 시간이 아침이어서였을까, 공원과 운동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만 기억이 난다.


순례자의 길을 걸으며 아침식사는 대부분 지나는 마을이나 도시에 있는 까페에서 '메디아 루나'와 '까페 콘 레체(까페라떼)'로 해결했다. '메디아 루나'는 크로아상하고 비슷한 빵인데 스페인어로 반달이라는 뜻이다. 완전한 원의 반쪽은 아니지만 반달 모양이라서 그렇게 부르나 보다. 

로그로뇨 시가지로 들어가는 다리




위 사진을 찍었을 때는 아직 정오가 되기까지 한두시간 남겨두었을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이 사진 뒤로 뒷날까지도 찍은 사진이 없다. 전날의 과욕이 부른 화로 인해서 걷는데 신경을 쓰다보니 사진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닳아버린 트래킹화 바닥 밑에 닿는 뾰족한 돌멩이의 느낌이 조금 불편하다 싶었다. 인간의 걸음걸이 특성상 특정 부위는 그 자극을 계속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며칠간 그게 반복되다보니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아마도 처음 계획했던대로 20km씩 꾸준히 걷었다면, 그리고 충분히 발에 쌓인 피로를 풀어주었다면 한계가 오는 시점이 훨씬 늦어졌을텐데 어제 과욕으로 계획을 훨씬 초과해버리면서 그 시점이 오히려 앞당겨진 것이었다.


불편함을 넘어서는 통증이 느껴져서 양말을 벗어보니 발바닥의 앞부분에 이미 500원짜리 동전만한 물집이 잡혀있었다. 그 뒤로는 가능한 발바닥에 닫는 압력을 줄이기 위해 조심히 걸어야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보니 이미 물집은 터졌지만 크기는 오히려 켜져있었다.


트래킹화가 낡지 않았더라면, 계획한만큼만 걸었더라면, 걷기를 끝내고 발에 쌓인 피로를 푸는데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상약으로 가져간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여두는 수 밖에... 과욕이 화를 불렀다.


처음엔 하얀 부분만 물집이었지만 점점 커지더니 발가락 첫째마디까지 거대한 물집이 되어버렸다.

셋째날 사진을 보고 기억을 되살리다보니 과욕을 부린 날은 세번째 날이었다. 앞서 썼던 블로그 내용을 수정했다.


이 날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간에 걷기 시작했다. 오늘 걸어야 할 경로에서 기대되었던 것은 이라체라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와이너리 앞을 지나는 것이었다. 이 곳은 와이너리 앞에서 순례자를 위해 포도주를 제공하는 것으로 순례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꽤 유명한 곳이다. 




묵었던 마을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동이 틀때쯤 이라체에 도착했다. 나보다 먼저 이 곳에 도착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알려진 것처럼 왼쪽은 포도주가, 오른쪽은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두개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진만 찍을 뿐, 포도주도 물도 받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다가가 돌려보니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너무 일찍 와서 그런지 포도주도 물도 나오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는 커녕 물도 못얻어마실 지경이 되었다. 이 곳에서 기념으로 포도주라도 한잔 할 요량이면 너무 이르거나 늦은(늦으면 포도주가 다 떨어질지도...) 시간대는 피하는게 좋겠다.



이 곳은 드물게도 아직 밀 수확을 마치지 않았다.


한참 걷다 뒤돌아보니 이제야 해가 뜨기 시작했다. 순례자의 길이 대략 스페인의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나있다보니 오전에는 대부분 해를 등지고 걷게 된다.







그림자가 무척 짧아졌다. 이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를 찾아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길이 평탄해서인지 24킬로를 걸었는데도 아직 정오가 되지 않았다. 레스토랑에서 '메뉴 델 디아'를 먹으며 더 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를 고민했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필 여기서 다음 마을까지는 8킬로가 넘었고, 그러면 이 날은 30킬로를 걷는 셈이었다. 게다가 가장 더울 때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걷는데 너무 흥이 난 나머지 무리하기로 결심해버린 것이다.



이후로 다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사진이 없다. 사진은 커녕 물도 다 떨어져 큰일날뻔 했다. 가장 더운 시간에 걷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목표한 곳까지 도착하지 못했다면 나무 그늘에 앉아 해가 기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더위와 갈증으로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가까이 보이는 가게에서 생수 두 병을 들이켜고 나니 그제야 주위를 돌아볼 정신이 돌아왔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하얀 옷에 빨간색 머플러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라고 해도 작은 골목 수준이지만)에는 펜스가 쳐져있었고 마을의 조그만 광장에는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뭔가 축제를 하는 것 같았다. 무리해서 걸은 보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에서 짐을 내려놓고 저녁식사를 하려고 나오니 축제가 한창이었다. 축제는 팜플로냐에서 하는 소몰이 축제의 축소판이었다. TV에서 봤던 것처럼 잔뜩 흥분한 황소가 거칠게 내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소 앞을 뛰어다니며 가끔 위험하다 싶으면 펜스 위로 몸을 날렸다. 펜스에 매달린 사람들은 소들이 지나갈 때마다 환호하며 웃음을 떠뜨렸다.


똑딱이 카메라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폰4로 찍은 해상도 낮은 사진으로 밖에 남겨두지 못한게 아쉽다.

작은 광장 한쪽에서는 스페인 가수(유명 가수는 아닐테지만)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고, 반대편 길에는 달리는 소가 사람들에게 뛰어들지 못하도록 펜스가 처져있다.



사람과 소의 경주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펜스에 매달려 있다.



이미 살짝 취한듯한 여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나에게 자기들을 찍으라고 강요아닌 강요를 했다.


큰 도시의 성대한 축제도 아니고 볼거리가 많지도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소박하고 흥겨운 축제였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축제가 가장 많은 나라라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네 축제는 준비한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축제가 아니라 외지 관광객을 위한 축제이고 돈을 벌기 위한 축제라는 것이 많이 달랐다. 자생적으로 생긴 세계의 유명한 축제들은 대부분 그들이 즐기기 위한 축제에서 발전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축제여야 국가나 지자체의 예산지원 없이도 오랫동안 지속되며 결국은 그 축제를 즐기러 관광객들이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

둘째날에도 6시쯤 걷기 시작했다. 7월말 스페인은 무척이나 덥고 태양이 강하기 때문에 6시 출발, 12시나 늦어도 1시 전에 도착하는 것으로 나름의 규칙을 정했다.




걷다보면 주위가 천천히 밝아온다. 그리고 한두시간쯤 지나면 벌써 햇볕을 받은 등과 목덜미에 뜨끈한 열기가 전해진다. 길은 다양하다. 도시의 평평하고 잘 정돈된 길도 있고, 농로나 자갈길, 산길도 있고,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를 따라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이 비포장된 길이기 때문에 신발이 무척 중요하다. 당연히 밑창이 두꺼운 등산화나 트래킹화가 좋다. 가끔 이런 신발들은 배낭에 매단채, 슬리퍼를 신고 걷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물집이나 다른 더 고통스러운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다니는 것이다.


내 신발도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6개월째 여행하는 동안 많이 닳아서 밑창이 얇아지고 맨들맨들해진 것이다. 이틀짼데 벌써 발바닥을 콕콕 찌르는 자갈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걷다보면 곳곳에서 포도나무가 보였다. 순례자의 길에 대한 여행기나 수필을 읽어보면 포도를 따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여름은 포도가 한참 익어가는 시기라 먹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연히 극심한 갈증 때문이 아니라면 함부로 먹어서도 안될테고.


페인에도 와인이 무척 많이 생산된다. 와인이 무척 싸기 때문에 자주 와인을 마실 수 있다. 각 마을이나 도시의 레스토랑마다 '메뉴 델 디아'라는 메뉴가 있다. 우리말로는 '오늘의 메뉴'인데 큰 도시의 관광지에서는 15유로, 관광지가 아닌 작은 마을에서는 6~10유로 정도면 먹을 수 있다. 언뜻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에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음료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음료로 와인을 선택하면 레스토랑의 하우스 와인을 유리병에 담아 내어주거나 병째로 주는 경우도 있다.


와인과 함께 에피타이저(스파게티나 샐러드), 메인(돼지, 소, 닭고기 요리), 디저트(아이스크림)을 먹는데 그 정도 가격이라면 저렴해도 엄청 저렴하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은 과거 작은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고 한 나라로 통일된지 얼마되지 않은데다가 언어도 조금씩 다르다. 역사적으로도 분리독립 요구를 융화보다는 독재와 억압으로 눌러왔기 때문에 아직도 독립을 요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팜플로냐에서 시작한 순례길은 바스크 지역을 지나는 동안 도로나 길 곳곳에 독립을 요구하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정치적으로 탄압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과거가 불과 몇 십년 지나지 않았기에 이들의 독립 요구가 비이성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이들에게 사과하고 감싸안지 못하는 스페인 정부의 무능함이 한심해지지만 생각해보니 우리 또한 별반 다를게 없다.





한낮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이제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를 찾아 쉬어야 할 시간인 것이다. 빨리 쉬어야 내일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오늘은 Estella까지 24km 정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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